정치적 계산에 허물어지는 안보 백년대계(百年大計)

'먹고사는' 경제보다 '죽고 사는' 안보(安保)가 우선이다

인싸잇 = 유용욱 주필 |국민의 삶과 직결된 수많은 국정 과제 중 경제가 ‘먹고사는 문제’라면, 안보는 말 그대로 ‘죽고 사는 문제’다. 경제적 시련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지만, 안보가 한번 허물어지면 국가의 존망(存亡)은 물론 국민의 생명과 안전,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터전이 일순간에 잿더미로 변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은 지구상 유일하게 냉전의 아픔을 간직한 분단국가이자, 지금 이 순간에도 휴전선 너머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전쟁이 진행 중’인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최근 정부와 국방부가 추진 중인 육·해·공군 사관학교 통폐합 파동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을 보고 있자면, 필자는 참담함을 넘어 깊은 충격과 절망감을 금할 길이 없다.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질 정예 장교 육성 체계를 뿌리째 흔드는 이 엄중한 사안에 대해 정작 국민적 관심은 너무나 무관심하고 미미하기 때문이다. 안보를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무감각 속에서, 안보의 핵심 기둥이어야 할 사관학교가 정치적 계산과 왜곡된 명분 아래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조목조목 따져본 통폐합 명분의 허구성

 

국방부는 그동안 사관학교 통폐합의 당위성으로 미래전 대비, 합동성 강화, 학령인구 감소, 교육 효율화, 예산 절감 등 온갖 명분을 쏟아내며 대전 자운대(自雲臺)에 단일 '국군사관학교'를 세우겠다고 열을 올렸다. 그러나 국방부가 내세우는 명분들을 하나씩 조목조목 따져보면, 사관학교를 폐교하고 하나로 합쳐야만 해결되는 문제는 단 하나도 없다.

 

모두 현행 3군 사관학교 체제를 유지하면서 얼마든지 보완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사안들이다. 첫째, ‘합동성 강화’라는 명분의 허구성이다. 정부는 3군 사관학교를 하나로 합쳐야 육·해·공군 간의 합동작전 능력이 향상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참된 합동성이란 각 군의 독자적인 정체성과 전문성이 확립된 바탕 위에서 이뤄지는 모자이크식 결합이다. 교향악단에 비유하자면,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이 각자의 고유한 소리를 완벽히 낼 줄 알아야 아름다운 협주가 가능한 것과 같다.

 

각 군의 특성을 원칙도 기준도 없이 마구 섞어놓는 '반죽 통합'은 합동성이 아니라 전문성의 하향 평준화만 초래할 뿐이다. 이미 우리 군은 임관 후 합동군사대학교와 국방대학교 합동참모대학 등의 전문 교육과정을 통해 합동성을 극대화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세계 최고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을 비롯해 주요 선진국들이 육·해·공 사관학교를 엄격히 분리 운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학령인구 감소와 경쟁률 저하’라는 위기론의 왜곡이다. 인구 절벽으로 인한 장교 자원 감소는 사관학교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군 간부에 대한 처우 악화, 복무 여건 비현실화, 장기 복무 불안정성 등 군이라는 직업 자체의 매력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원인이 처우와 비전에 있다면 장교단의 복무 여건을 개선하고 인재 유입책을 마련하는 것이 상식이다. 지원율 하락을 이유로 학교를 통폐합하겠다는 것은, 환자의 병원균을 치료할 생각은 안 하고 단지 병상을 줄이겠다는 궤변에 불과하다.

 

게다가 최근 사관학교 경쟁률은 다시 반등하는 추세이며, 소수정예 정규군 장교를 길러내는 사관학교의 특성을 무시한 채 단순 학생 수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지독한 행정편의주의다.

 

셋째, ‘쿠데타 방지 및 카르텔 해체’라는 주장의 실증적 오류다. 통폐합 찬성론자들과 일각에서는 사관학교를 통합하면 특정 학교 출신의 카르텔이 사라지고 쿠데타가 예방될 것이라고 강변(强辯)한다.

 

그러나 이는 국제적 학술 데이터조차 부정하는 허구다. 글로벌 쿠데타 연구 DB를 기반으로 한 군사전문가의 교차검증 분석에 따르면, 병력 20만 명 이상의 주요 30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사관학교를 통합·혼합형으로 운영한 국가들의 쿠데타 발생 비율(71.4%)이 분리·전문화형 국가(47.8%)보다 무려 23.6%포인트나 높았다.

 

단일 학교로 통합할 경우 오히려 군종(軍種)을 초월하는 더 거대하고 강력한 동기·선후배 카르텔이 형성되어 정치적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뜻이다. 쿠데타 예방은 문민통제와 헌정 질서의 확립으로 이뤄지는 것이지, 학교 건물을 합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넷째, 막대한 예산 낭비와 교육 파행의 위험성이다. 정부는 통폐합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이루겠다고 하지만, 대전 자운대에 새로운 통합 캠퍼스를 신축하는 데만 국방부 추산 3조 원, 일각에서는 최대 10조 원에 달하는 재정이 소요될 것으로 본다.

 

뿐만아니라 자운대 캠퍼스 완공까지 최소 10년이 걸리는 과도기 동안, 생도들은 임시 시설과 이중 운영, 지속적인 이동 수업 등 극심한 교육 여건 저하를 겪어야 한다. 과도기에 입학한 생도들을 정책의 실험실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국방 개혁인가.

 

안보 백년대계 덮어버린 '정치적 보복'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이 거대한 국방 정책의 실체가 국방부 업무보고 등 공식 석상에서 나온 대통령의 발언으로 천하에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사관학교 통합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과거 쿠데타에 대한 책임을 묻고, 향후 내란 세력을 예방하기 위함이라는 ‘진짜 목적’을 진심 어린 발언으로 직접 털어놓았다.

 

국방부가 온갖 미래지향적 명분을 끌어대며 포장했던 사관학교 통폐합이, 사실은 특정 군 출신을 향한 징벌적 연좌제이자 정치적 보복에 불과했음이 국군통수권자의 입을 통해 자인(自認)된 셈이다.

 

국가 안보의 백년대계로 논의되어야 할 중차대한 군 교육 개혁이 정권의 정치적 치적쌓기와 이념적 응징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 이미 정책의 정당성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모양새는 참으로 우습고 가벼워졌다.

 

지난 26일 서울 용산 국방컨벤션에서 열린 '국군사관학교 창설 관련 공청회'는 이 왜곡된 정책 추진이 초래한 파국을 극명하게 보여준 현장이었다. 통폐합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요식 행위로서의 의견 수렴 절차를 밟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으나, 정작 공청회장에는 정책의 최종 책임자인 안규백 국방부 장관도, 차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책임자들은 쏙 빠진 채 참모진만 들어앉힌 공청회장에서, 평생을 군과 안보 현장에 헌신해 온 예비역 군 원로들과 동문, 그리고 일부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규백이 나와라", "사관학교를 그냥 폐교시키려는 정부가 깡패"라는 거친 고성이 터져 나오고, 단상으로 생수병이 던져지며 몸싸움 직전까지 가는 파행이 이어진 것은 정부가 자초한 자업자득이다. 장차관조차 당당하게 참석하지 못하는 공청회에서 대체 무엇을 듣고 무엇을 결정하겠다는 말인가. 도대체 이게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가겠다는 안보 행정인가.

 

'답정너' 추진 거두고 당사자와 국민 목소리 들어야

 

육·해·공군 사관학교는 어느 정권의 소유물도, 정치적 실험실도 아니다. 수십 년간 대한민국을 지켜온 붉은 피와 땀, 역사와 전통이 서려 있는 국가 안보의 귀중한 자산이다. 육사의 화랑대(花郎臺), 해사의 충무대(忠武臺), 공사의 성무대(星武臺)는 단순히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각 군의 정체성과 군인정신이 고스란히 숨 쉬는 호국의 상징이다.

 

이를 단칼에 베어내고 대전 자운대에 하나로 모아놓는다고 해서 정예 장교가 저절로 육성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진정으로 국가 안보를 걱정하고, 변화하는 미래전에 대비하는 정예 장교 육성을 원한다면 지금 당장 ‘답정너’식 통폐합 추진을 전면 백지화해야 한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해놓은 결론을 철회하고, 처음부터 차분하게 안보 백년대계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미래전 교육이 필요하다면 각 사관학교의 AI, 드론, 사이버 교육과정을 개혁하면 되고, 합동성이 필요하다면 교환 학생 제도와 합동 훈련을 확대하면 된다. 무엇보다 이 정책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복을 입고 밤을 새우며 국토를 수호하는 정예 장교가 되기 위해 애쓰는 사관학교 재학생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현역 장교들과 예비역 졸업생들의 목소리를 반드시 들어야 한다.

 

형식적인 공청회로 흉내만 낼 것이 아니라, 군의 미래를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절박한 호소를 아주 무겁고 비중 있게 듣고 이를 국정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 안보는 단 한 번의 오판(誤判)으로도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는 비가역적(非可逆的) 영역이다. 이처럼 국가의 존망이 걸린 백년대계를 특정 정파의 치적 쌓기나 정적에 대한 징벌의 수단으로 재단(裁斷)하는 것은 국방의 근간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정부는 '개혁'이라는 탈을 쓴 사관학교 통폐합을 즉각 거두어들이고 국방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 아울러 주권자인 국민 역시 국방 정책을 좌우의 진영 싸움이 아닌 '우리 모두의 생존권'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지금 이 정권이, 그리고 국방부가 제 길을 걷는지, 국가 안보의 초석이 흔들리지는 않는지 매서운 시선으로 국정의 행보를 주시하고 언제든 바른 목소리를 내야 할 시점이다. 주권자로서 국민 모두의 각성과 적극적인 참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 유용욱 주필

 

- 1993년 KBS 공채 19기

- KBS 전략기획실 성과평가부장

- KBS 법무실장

- KBS N 경영본부장

- 현) 인싸잇 경기 편집국장 및 공동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