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과 무한의 세계’ 쿠사마 야요이 별세… 향년 97세

세계적인 일본 현대미술가 쿠사마 야요이, 지난 14일 도쿄 병원서 별세

인싸잇=강인준 기자 | 강렬한 원색의 물방울무늬와 호박, 끝없이 이어지는 거울의 공간으로 세계 현대미술사에 독창적인 흔적을 남긴 일본의 거장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가 별세했다. 향년 97세다.

 

 

27일 쿠사마 야요이 측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쿠사마는 지난 14일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본 현지 언론은 사인이 다발성 장기부전이라고 전했다.

 

쿠사마 측은 성명을 통해 그가 97년에 걸친 생애를 예술 창작에 바쳤으며, 시각예술뿐 아니라 퍼포먼스와 문학, 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고 밝혔다. 특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고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고 전했다.

 

지난 1929년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에서 태어난 쿠사마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는 점과 빛, 꽃 등이 보이는 환영을 경험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는 자신을 괴롭혔던 이러한 경험을 피하기보다 그림으로 옮겼고, 훗날 그의 상징이 된 반복적인 점과 그물무늬는 독창적인 예술세계의 출발점이 됐다.

 

 

쿠사마는 전통 일본화를 공부한 뒤 1950년대 후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전위미술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뉴욕 미술계에서 회화와 설치, 조각,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활동했고, 캔버스를 작은 그물 형태의 붓질로 가득 채운 '인피니티 네츠(Infinity Nets)' 연작 등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1960년대에는 거울을 이용해 공간이 끝없이 반복되는 듯한 경험을 만들어내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발전한 '인피니티 미러 룸(Infinity Mirror Rooms)'은 쿠사마를 상징하는 대표작이 됐다.

 

관람객이 작품 속에 직접 들어가 무한히 확장되는 빛과 공간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쿠사마의 또 다른 상징은 호박이다. 노란색과 검은색 물방울무늬로 뒤덮인 호박 조각은 일본 나오시마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전시되며 현대미술을 잘 알지 못하는 대중에게까지 그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그의 삶은 화려한 성공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쿠사마는 오랫동안 자신의 정신적 고통과 환영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1970년대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도쿄의 정신의료시설에서 생활하면서 인근 작업실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쿠사마에게 예술은 단순한 직업을 넘어 자신을 지탱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한동안 국제 미술계의 중심에서 멀어졌던 쿠사마는 1980~90년대 이후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특히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일본관 개인전 등을 계기로 다시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고 이후 뉴욕 현대미술관(MoMA), 런던 테이트 모던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미술관을 넘어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루이비통 등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와 협업했고, 그의 물방울무늬와 호박은 미술과 패션, 상업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작품 가격 역시 크게 상승해 세계 미술시장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여성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됐다.

 

특히 그의 인피니티 미러 룸은 소셜미디어 시대를 만나 새로운 세대의 관람객을 미술관으로 끌어들이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쿠사마의 작품세계가 만들어진 시기는 이러한 대중적 유행보다 훨씬 앞선 1950~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복과 무한, 자아의 소멸이라는 주제를 수십 년 동안 일관되게 탐구했다는 점이 그를 단순한 인기 작가와 구분 짓는다.

 

 

쿠사마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한 것은 무한이었다. 하나의 작은 점이 수없이 반복돼 화면을 뒤덮고, 거울 속 작은 빛 하나가 끝없는 우주처럼 확장된다. 개인이 겪은 고통과 환영에서 시작된 이미지는 결국 국경과 세대를 넘어 수많은 관람객이 공유하는 미술 언어가 됐다.

 

97년의 생애 마지막까지 작품을 만들었던 쿠사마 야요이.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현대미술은 가장 독창적이고 대중적인 시각 언어를 만들어낸 거장 가운데 한 명을 잃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