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 = 유용욱 주필 | 아득한 수평선 저편에서 밀려오는 영종도의 후텁지근한 밤바람을 뚫고 들어선 인스파이어 아레나. 거대한 공간을 가득 채운 화려한 조명과 조밀하게 잘 벼려진 음향 사이로, 마침내 그 특유의 맑고도 서러운 미성(美聲)이 흐르기 시작했다.
보컬의 신(神)이라 불리는 사내, 어느덧 데뷔 40주년을 맞이한 이승철의 무대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명곡이 각자의 기억과 감동 속에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대 조명이 옅어지고 '네버엔딩 스토리'의 첫 피아노 선율이 전율처럼 울려 퍼졌다. 100개가 넘는 장내 스피커를 통해 그의 애잔한 감성 보이스가 흘러나온 순간, 왈칵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필자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고 말았다.
지난 30여 년간 '가장(家長)'이라는 단단한 껍데기를 쓰고 살아온 세월. 세상만사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무던해졌다고, 웬만한 세상 풍파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고 자부하던 가슴 한구석이 순식간에 수직으로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누가 알아볼세라 얼른 손으로 눈가를 훔쳐내며 생각했다. 이 눈물은 단지 보컬 신 이승철의 노래가 아련해서가 아니라, 그 노래에 새겨진 그와 나의, 그리고 우리 세대를 넘나들며 굽이친 세월 때문이라고.
벼랑 끝에서 빚어낸 40년, 그 신산(辛酸)했던 보컬리스트의 궤적
1986년, 록밴드 부활의 보컬로 처음 마이크를 잡았던 청년 이승철. 그의 40년 음악 인생은 천재적인 가창력이라는 찬란한 빛 뒤로 참으로 신산하고도 혹독한 그늘을 동반한 시간이었다. 젊은 날의 오만과 방황, 화려했던 정상의 환호 뒤에 밀려온 이별과 이혼, 그리고 세상의 모진 비난과 재기, 새로운 인연과의 재혼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그 자체로 거친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외로운 배와 같았다.
그러나 시련의 맷돌에 깎이고 갈려 나간 것은 그의 가창력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희야"를 부르던 청년의 패기와 날 선 감성은 세월의 모퉁이를 돌며 타인의 아픔을 포용하는 깊은 울림으로 변해 있었다.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은 그는 이제 단순히 음을 내지르는 가수가 아니었다.
자신의 삶에 찾아왔던 숱한 비바람과 상처, 그리고 그것을 견뎌내며 얻은 삶의 주름을 담담히 노래로 털어놓는 스토리텔러였다. 그가 토해내는 깊은 고음은 그 신산했던 세월이 결코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음을, 오히려 그를 비로소 '진짜 어른'으로 만들어주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무대 위의 ‘그’와, 무대 아래에서 늙어가는 ‘나’의 교차점
노래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갈수록, 나는 무대 위 그가 걸어온 길 위로 지나온 나의 삶을 겹쳐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덧 뜨거웠던 청춘의 계절을 뒤로하고 머리칼에 서리가 내린 채 삶의 종착점(終着點), 혹은 어쩌면 이미 그 너머를 지나고 있는 나. 사실 우리 또래의 삶 역시 이승철의 인생만큼이나 고단하고 신산하지 않았던가.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던 20대의 열정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가정을 지키고 일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뼈를 깎는 침묵을 견뎌야 했던 30대와 40대가 있었다. 그 길 위에는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이별의 상처가 있었고, 밤잠을 설치게 했던 실패의 기억과 차마 남들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수많은 고독(孤獨)이 켜켜이 쌓여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이라는 외로운 무대 위에서, 때로는 박수를 받고 때로는 조명이 꺼진 무대 뒤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쳐야 했던 보컬리스트들이었다. '네버엔딩 스토리'의 가사 중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이라는 구절은, 실은 세상의 모진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가슴속 깊은 곳에 자신만의 순수와 소중한 이들을 지켜내려 애썼던 우리 세대 모두의 고통스러운 고백이었던 셈이다.
상처를 보듬는 온기, 그리고 끝나지 않을 우리들의 사랑
이 나이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청춘의 사랑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불꽃이었다면, 인생의 후반부에 만나는 사랑은 비바람을 함께 맞아준 서로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여주는 담담한 온기라는 것을.
이승철이 인생의 거친 굽이를 지나 다시 평온한 가정을 이루고 한층 더 깊어진 음악을 선보이듯, 우리 역시 숱한 상처와 번민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타인을, 그리고 서툴렀던 지난날의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공연이 끝나고 아레나를 빠져나와 캄캄한 밤바다를 차로 지나치며 바다의 숨소리를 들었다. 이승철이라는 한 가수가 살아낸 40년의 세월이 그러했듯, 때론 넘어지고 부서지면서도 견뎌내고 버텨낸 우리들의 삶 역시 그 자체로 충분히 숭고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지나온 날들에 후회와 아쉬움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때늦은 후회나 아쉬움이 아무리 짙게 남았을지라도, 우리가 가슴으로 울며 그 순간을 지켜낸 기억과 사랑은 그때의 순수한 마음과 함께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영종도의 밤바람을 타고 귓전을 계속해서 맴도는 그 아련한 멜로디처럼, 이 모진 세월에도 절대 마모되지 않은 우리들의 진짜 이야기는 여전히 '네버엔딩 스토리'다. 이 모진 세파(世波)를 견뎌내며 지금까지 나름 잘 살아낸 나 자신과,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하여 건배!
□ 유용욱 주필
- 1993년 KBS 공채 19기
- KBS 전략기획실 성과평가부장
- KBS 법무실장
- KBS N 경영본부장
- 현) 인싸잇 경기 편집국장 및 공동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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