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 = 유용욱 주필 | 대한민국 고교야구장이나 축구장 등은 본래 청춘의 에너지와 날것 그대로의 승부욕이 뒤엉키는 매우 역동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때로는 거친 응원이 오가기도 하고, 또 때로는 승부에 눈이 멀어 철없는 실언(失言)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는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광주일고와 배재고의 경기에서 나온 이른바 '스타벅스 · 탱크데이' 응원 구호 논란을 보면,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씁쓸함을 넘어서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철부지 아이들의 엇나간 장난이 온 나라를 뒤흔드는 정치적 스캔들로 비화하는 이 과정은,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지독한 '정치과잉 앓이'를 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엇나간 인터넷 밈(Meme)을 무조건적 '혐오'로 규정하는 사회
물론 배재고 선수들의 행동이 잘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최근 모 기업의 마케팅 논란으로 불거진 역사적 상처를 상대 팀을 약 올리는 도구로 삼은 것은 분명 정당한 스포츠정신에 어긋나며, 생각의 깊이가 얕았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학교 측의 내부 징계와 교육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이 사안을 대하는 사회적 반응은 과하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5·18 단체의 진상조사 촉구는 철없는 고등학생들의 더그아웃 응원을 '조직적 지역 혐오'로 격상시켰다. 그뿐인가. 교육청과 전교조가 나서면서는 '반역사적 행위', '극우 혐오 표현의 침투'라며 거창한 이념의 잣대를 들이댄다.
이들에게 진정 묻고 싶다. 이것이 과연 온 사회가 벌떼처럼 일어날 일인가? 인터넷 커뮤니티의 자극적인 밈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아이들의 철없는 일탈을, 마치 거대한 사상적 배후가 있는 것처럼 몰아세우는 어른들의 시각이야말로 또 다른 색깔론이자 마녀사냥이다. 야구장에서, 또 축구장에서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쌍욕이 오갈 때는 미소까지 지어가며 침묵하던 이들이, '정치적 올바름'의 영역을 건드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앞을 다투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다.
배재고 교장의 광주 방문, 그것은 '교육'인가 '쇼'인가
이번 사태와 관련한 논란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 중 가장 웃픈 장면은 배재고등학교 측의 대처다. 사과문조차 생성형 AI로 대충 찍어내 동네방네 매를 벌더니, 이제는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들이 짐을 싸서 광주일고까지 찾아가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심지어 학생과 학부모까지 동행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란다. 어처구니가 없다. 배재고 교장에게 묻고 싶다. 이것이 과연 교육적인 처사인가?
배재고 교장의 이런 행동은 아이들을 향한 진정성 있는 훈육 대신, 여론의 뭇매를 피하기 위해 읍소하는 '어른들의 비겁한 정치'를 보여줄 뿐이다. 이런 모습은 결국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 중 하나인 책임 회피성 보여주기에 불과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잘못을 하면 자숙하고 반성하는 것보다, 권력과 여론 앞에 굴복하는 쇼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비겁한 생존법을 몸소 상기시킬 뿐이다. 적어도 학교라는 곳에서는 대단히 부적절한 메시지 전달법이다.
학교는 교육 기관이지, 정치적 이익단체가 아니다. 학생들이 잘못했다면 학칙에 따라 엄하게 벌하고, 왜 그것이 잘못되었는지 교실 안에서 엄숙하게 가르치면 될 일이다. 교장이 나서서 광주까지 내려가 고개를 숙이는 모양새는 교육적 효과는커녕, 아이들에게 '정치적 과잉 대응'의 나쁜 선례만 남길 뿐이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이성을 찾아야 할 때
지금 우리 사회는 좌와 우, 영남과 호남을 막론하고 모든 사안을 이념의 렌즈로만 바라보는 고질병에 걸려 있다. 고등학생들의 철없는 응원 구호 하나에 교육청, 교원단체, 역사 단체가 총출동해 호통을 치는 모습은 결코 정상적인 사회의 풍경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번 사안으로 광주일고 측과 호남 지역사회가 느꼈을 참담함과 분노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5·18'이라는 단어가 품은 현대사의 거대한 아픔과 숭고한 희생을 생각하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철없는 아이들의 조롱거리나 경기장의 유희(遊戲)로 소비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민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어른들이 먼저 보듬고 위로해야 마땅한 우리 모두의 부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이 문제를 다루는 어른들의 방식은 신중하고 성숙했어야 했다. 스포츠 현장에서 불거진 학생들의 비뚤어진 일탈을 '4만 동문과 전 지역민의 분노'라는 거대한 정치적 수사(修辭)로 확전시키는 것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라운드에서 벌어진 미숙함은 스포츠맨십의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바로잡고, 아이들의 비틀어진 역사 인식은 학교라는 교육의 울타리 안에서 준엄하게 가르쳐 깨닫게 하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좌우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선명성을 증명하거나 면피(免避)하기 위해, 고교야구장이라는 교육의 현장까지 난입해 과잉 분노를 쏟아내는 어른들의 꼴불견은 이제 멈춰야 한다. 아이들의 철없는 실수를 거대한 괴물로 키워내는 것은, 언제나 이성(理性)을 잃은 어른들의 과잉 정치화와 지나치게 냉소적인 세상이다.
□ 유용욱 주필
- 1993년 KBS 공채 19기
- KBS 전략기획실 성과평가부장
- KBS 법무실장
- KBS N 경영본부장
- 현) 인싸잇 경기 편집국장 및 공동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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