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백소영 기자 ㅣ 이재명 정부가 중국과 북한을 거쳐 방한한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싱가포르 외교장관을 계기로 북한과의 대화 여건 조성을 위한 외교적 접촉면을 넓히고 있지만,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방북 직후 “북한은 의미 있는 대화 채널을 열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 28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발라크리쉬난 장관과 회담하고 한반도 정세와 양국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지난 24일부터 28일까지 중국·북한·한국을 차례로 방문했으며, 지난 26~27일 평양에서 최선희 북한 외무상, 조용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을 만난 뒤 한국을 찾았다.
정부는 발라크리쉬난 장관의 중국·북한·한국 연쇄 방문을 계기로 싱가포르 측에 대북정책 방향과 대화 의지를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장관은 29일 공개된 인터뷰에서 “정부의 대화 의지를 싱가포르 측에 전달했다”며 “긴장 완화, 한반도 평화 정착 노력 등에 대해서는 북한도 언젠가 화답하리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조 장관도 “현재로서 대화할 기미가 보이지는 않는다”며 “이재명 정부의 새로운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소상히 설명했다는 정도”라고 말했다.
정부가 싱가포르 측에 설명한 대북 메시지는 구체적인 회담 형식보다 평화공존과 긴장 완화 기조에 무게가 실린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군사분계선 일대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과 시설 철거, 민간 대북전단 및 무인기 단속 등 대북 유화 조치가 이어진 것도 이 같은 기조의 연장선에 있다. 외교부도 회담 결과를 통해 조 장관이 발라크리쉬난 장관의 방북 소감을 듣고, 북한과의 대화 재개 여건 조성을 위해 싱가포르와 아세안 차원의 관심과 지원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방북 장관 “北, 대화보다 군사억제력 강화 집중”
그러나 발라크리쉬난 장관이 방북 뒤 내놓은 평가는 정부의 기대와 온도 차가 있었다.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지난 28일 자국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은 이 시점에 미국이나 한국, 일본과 의미 있는 대화 채널을 열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미국 또는 한국과의 대화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며 “대신 그들은 자립성, 그리고 군사 억제력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싱가포르는 2018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첫 북미정상회담 장소를 제공한 국가다. 이 때문에 발라크리쉬난 장관의 중국·북한·한국 연쇄 방문을 두고 북미 또는 남북 대화 재개를 위한 중재 가능성이 거론됐다. 하지만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싱가포르가 먼저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하겠다고 손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우리는 항상 북한과 소통 채널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 아세안지역안보포럼, ARF 참여를 권하고 싶다는 입장도 밝혔다.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앞서 최선희 외무상과의 면담에서 북한을 ARF에 초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가 제3국과 다자외교 무대를 통해 접촉면을 넓히려는 가운데, 북한이 실제 대화로 응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두 국가론’ 확인한 싱가포르… 통일 거부 기조도 변수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이번 방북에서 북한의 ‘두 국가론’ 기조도 강하게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북한이 2018년과 가장 달라진 점으로 “한국과의 통일에 대한 명백하고 단정적인 거부”를 꼽았다. 이어 “그들은 통일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 장관도 발라크리쉬난 장관으로부터 “북한이 그동안 주장해온 적대적 두 국가론이 무엇인지 보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북한은 최근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는 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가 평화공존과 대화 재개를 강조하더라도, 북한이 남북관계의 기본 성격 자체를 기존 통일 담론이 아닌 별도 국가 간 적대 관계로 재정의하고 있다는 점은 대화 재개의 핵심 변수로 꼽힌다.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한국과 미국을 향해서는 “전략적 인내”를 당부했다. 그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며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북한에 도움을 줄 수 있거나 대화 채널을 열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동영, EU에도 역할 당부… 정부 대화 구상은 확대
정부의 대북 대화 구상은 싱가포르와 아세안뿐 아니라 유럽연합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 28일 유럽의회 한반도관계대표단과 만나 이재명 정부의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을 설명하고 EU의 역할을 요청했다.
정 장관은 “이재명 정부는 독일 모델의 흡수통일을 반대한다”며 점진적·단계적·평화적 방식으로 민족공동체의 통합성을 추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EU가 주관하고 남북이 함께하는 ‘2+1 다자대화’ 틀이 만들어지길 희망한다고도 했다.
정부는 싱가포르와 아세안, EU 등 제3자를 통한 외교적 접촉면을 넓히고 있지만, 북한의 반응은 아직 냉담한 상황이다. 오는 7월 ARF가 남북 또는 북미 접촉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은 남아 있다. 발라크리쉬난 장관이 최선희 외무상에게 ARF 참석을 권유했고, 정부도 북한의 외교 다변화 흐름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이 ARF에 참석하더라도 실질 대화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정부는 대화 여건 조성을 위한 외교적 접촉을 이어가고 있지만, 북한은 당분간 자립성과 군사억제력 강화 기조에 무게를 둘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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