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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데일리신초 “한국의 역사인식은 건국부터 비뚤어져… 일본이 사죄해도 소용없어”

“일본이 전쟁 가해국이면 당시 그 국민이었던 조선반도 출신도 가해자 …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명확하게 제시된 사실 ”

일본의 한 반공우파 언론이 한국 역사 교과서의 과장·왜곡 문제에 대해서 직격탄을 날렸다. ‘사실’보다 ‘이념’에 입각한 서술이 많으며 특히 항일운동사를 과도하게 부풀리고 있다는 비판이다.
 
지난달 27일, 일본의 대표적인 시사주간지 ‘슈칸신초(週刊新潮)’의 인터넷판인 ‘데일리신초(デイリー新潮)’는 “역사를 배우면 일한 우호의 길로 갈까?(歴史を学べば日韓友好は進むのか 『検定版 韓国の歴史教科書』の困った内容)” 제하 기사를 편집부 명의로 실어 이같이 지적했다. 


“한국인들이 배우는 역사는 국제적 시각에서도 상당히 독특해”

이날 데일리신초는 “전후 최악이라고 일컬어지는 일한관계는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TV, 신문, 잡지, 인터넷에서 이와 관련된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며 “최근 늘어난 의견은 ‘정부 간 관계는 그렇다 치고, 민간교류로 개선을’이라는 식 논조”라고 서두를 뽑았다. 

데일리신초는 “8월 17일의 방송 ‘보도 특집’ (TBS계열)에서도 일본과 한국 사이의 학생 교류 문제를 다루었다”며 “물론 진지한 민간 교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그러나 이러한 민간, 특히 젊은이들끼리의 교류 시에 자주 전해지는 것이 ‘일본 젊은이들은 역사를 모른다’는 한국인의 말”이라며 “동 프로그램에서도 한국의 젊은이가 그렇게 말했고, 일본 젊은이가 ‘그럴지도’라면서 동의를 나타내는 광경이 방송됐다”고 전했다. 

데일리신초는 “여기서 프로그램 제작자 측, 혹은 한국인이 제시하는 주장이 바로 ‘일본인은 (침략 등의) 역사를 모른다. 따라서 진정한 반성, 사과를 할 수 없다. 이대로라면 상호이해가 깊어지지 않는다’는 식의 시각”이라고 전했다. 

이같은 시선에 대해 데일리신초는 “분명히 서로가 이해하려면 지식이 필요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민간교류를 추진하고 싶다는 일본 젊은이들에게 동정할만한 점도 많다”고 지적했다. 

데일리신초는 “흔히 지적되는 것처럼 일본의 역사교육에서 근현대에 할애하는 시간은 적다”며 “게다가 원래 한국 젊은이들이 알고 있다는 역사와 일본 젊은이들이 배운 역사는 사뭇 다르다”고 꼬집었다.

따라서 “‘이런 것도 모르냐’고 상대가 놀라더라도 곤란한 면도 있다”며 “그 ‘이런 것’ 중에서 일본에서 인정된 사실과 다른 내용도 많고, 특히 전쟁 종결부터 한국 독립까지의 경위는 한국인들이 배우는 역사가 국제적 시각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연합국 일원으로 싸워 이긴 전승국'이라고 오도하려 해”

이어서 데일리신초는 한국의 역사 교과서 서술 방식에 비판적인 한  학자의 견해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데일리신초는 “와세다대학 교수인 아리마 데쓰오(有馬哲夫)는 중국이나 한국이 교과서 등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미국과 일본 등 민주주의국가의 역사와 달리 사실보다는 '건국 이념', '정치 이념'이 중시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면서 아리마 교수의 저서 ‘이렇게 역사 문제는 왜곡된다(こうして歴史問題は捏造される)에서 한국의 역사 교과서와 관련한 대목을 인용해 소개했다. 



데일리 신초가 소개한 책 ‘이렇게 역사 문제는 왜곡된다’는 한국의 교과서가 항일 운동과 관련해 객관적이지 못한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이하 인용 내용은 ‘이렇게 역사 문제는 왜곡된다’의 제 4장 ‘중국과 한국이 반증 불가능한 토론을 하는 이유가 있다(中国と韓国が反証不可能な論議をするのには理由がある)’에서 데일리신초가 일부 단어를 보충한 것이다. 일본인들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으로, 이에 내용 전체를 전재한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요? 중국이 '공산당이 일본군을 무찌르고 무조건 항복시켰다'고 오도했듯이, 한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싸워 이긴 전승국'이라고 오도하려 합니다.

‘검정판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따르면 1919년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하는 연해주그룹,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상하이그룹,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이동휘를 국무총리 총재로 하는 서울그룹이 합체하고,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고 기술되어있습니다. 이 정부는 민주 공화제를 취하고 삼권 분립을 명백히 제시한 헌법을 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독립이 아니라 국제연맹 통치하의 위임통치령으로 해달라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편지를 써서 요청한 것이 밝혀져 결국 실각합니다. 그 후, 임시정부는 '외교활동'에 주력하여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고 했다’(‘검정판 한국의 역사 교과서’ 원문 그대로의 내용), 하지만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워싱턴에 구미위원부(이승만),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서재필), 파리위원부(김규식)를 설치하고 ‘국제연맹과 워싱턴 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윤색된 부분도 있지만 허구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제출하려고 했다’라고, 미수에 끝난 일을 일부러 기술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제연맹도, 미국도 ‘독립을 목표로 하는 한 세력’으로 봤으나, 하나의 국가로 다루지 않았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과서는 (임시정부가)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다는 뉘앙스를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한국 교과서는 임시정부를 국가라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아리마 데쓰오의 책은 한국 역사 교과서의 서술과 달리 조선광복군은 애초 연합국 군대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도 짚었다.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국의 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시켰다’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영국군의 협조요청으로 인도, 미얀마 전선에 파견된 광복군은 주로 선전활동이나 포로 심문을 담당했다. 또 미국과 연합해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다. (중략) 하지만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해 국내진공작전은 실행되지 않았다.’

여기서 다시 이 교과서는 임시정부를 국가라고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국가만이 할 수 있는) '선전포고'라고 기술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항일운동을 해왔고, 일본과 싸울 의지, 그 대의를 주장해왔는데, 일부러 1941년 시점에서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임시정부가 국가이며 그 군대인 ‘한국광복군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시켰다’, 따라서 연합국의 일원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는 ‘한국광복군’이 일본군과 전쟁터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인도나 미얀마(버마)에 파견되어 ‘주로 선전활동이나 포로 심문을 담당했다’고 기재되고 있습니다. 즉, 항일 세력의 일부가 영미 첩보기관(영국MI6, 특수공작국SOE, 미국전략정보국OSS)에 채용되어 일본군 안에 있는 조선반도 출신자용 프로파간다 제작을 하거나 조선어로 심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군' 규모도 아니고, 활동 내용도 군사 활동이 아니라 그저 첩보활동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미국 측 자료를 보면 ‘조선광복군(Korean Restoration Army)’은 존재했지만 이는 중국 충칭에 있었으며, 중국군사위원회(Chinese Military Council)의 지휘 하에 있었습니다. 즉 독립된 군사조직이 아니라, 중국 국민당군 산하의 한 조직이었습니다. 인원  수에 관해서는 적어도 이 조직 내에서는 모두 긁어모아도 200명에 불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주에도 다른 조직인 ‘조선광복군’이 있었는데 인원은 약 3천명입니다. 역시 독립조직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 게릴라들과 함께 했습니다. 아마 이 '조선광복군'에서 현재 북한의 기틀을 다진 지도자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왜, ‘한국광복군’(교과서에는 그렇게 기재)이 일부러 인도나 미얀마에 파견되어 ‘주로 선전 활동이나 포로 심문을 담당’했는지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중국 병사들과 함께하지 않는 한, 만주나 중국의 전쟁터에서 일본군과 싸울 수 있는 인원수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 미국 국무장관 고문 존 포스터 덜레스는 이승만이 ‘서명국으로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참가하고 싶다'고 요구했을 때, ‘한국은 일본과 전쟁상태에 있었던 적이 없으며 연합국 공동성명에도 서명하지 않았다’고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아주 알기 쉬운 것입니다. 

즉, 연합국으로서 일본군과 싸운 실적이 한국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조선에 비하면 필리핀, 버마(현재의 미얀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일본군과 싸운 확실한 실적이 있습니다. 

“허구를 진실답게 만들기 위해 미수에 그친 항일 세력의 내용을 서술”

아리마 데쓰오의 책은 또 한국의 역사 교과서가 항일 운동과 관련, 미수에 그친 일들을 과도하게 부풀리고 있다면서, 허구를 진실처럼 만들고 있다고 돌직구를 날렸다.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에서 ‘일본의 패배 후,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결의가 성립된 것은 영국, 미국, 소련이 일본의 패전까지, 실제로는 1948년까지,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패전하기 전인 1945년 4월부터 국제연합을 출범할 준비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되면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대표를 보내고 싶다고 신청합니다. 그러나 앞서도 서술한 이유로 영국과 미국은 이것을 각하합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소련이 얄타회의에서 일본이 전쟁에 패할 때까지 조선을 자국의 세력 하에 두기로 밀약했기 때문에 임시정부 대표 수용 여부를 영국과 미국은 간섭할 바가 아니라고 물고 늘어져 영미 양국을 분노케 합니다. 

이 또한 어떻게든 국가로서 인정받고 싶고, 국제연합에 참가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과 연합하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다’라는 줄거리는 판타지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역사란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지, ‘계획한’ 일이라든지, ‘하려고 했던’ 것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검정판 한국 역사교과서’의 현대사 부분에는 미수에 그친 내용에 대한 서술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항일세력이 1919년 단계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를 수립했었다, 1941년에 국가로서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상태로 돌입했으며, 연합국의 승리로 전승국가가 되었다, 이런 허구를 진실답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일본이 전쟁 가해국이면 당시 그 국민이었던 조선반도 출신자도 가해자다”

아리마 데쓰오의 ‘이렇게 역사 문제는 왜곡된다’는 한국인들이 '독립국, 전승국 신화'에 매달리는 이유도 분석했다. 

실태는 다른데 과연 왜 한국은 ‘국가’에 집착할까요? 그 이유는 과거에 조선반도가 일본의 영토였던 점, 그 출신자는 조선인이어도 모두 일본인으로 분류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즉 일본인으로 일본의 전쟁에서 싸웠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다음 내용도 인정하게 됩니다. 일본은 패전국이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영토였던 한국 및 북한도 패전국이다. 일본은 전쟁에서 아시아 국가들에 피해를 줬지만 당시 일본인이었던 조선인도 그들에게 피해를 줬다. 일본군이 전쟁 중 잔학행위를 했지만, 그 일원으로 조선반도 출신자들도 잔학행위를 했다. 일본 병사가 위안소를 이용했으므로 조선반도 출신자들도 이용했다. 전쟁터나 점령지의 여성을 납치해 감금하고 강간했는데, 그런 행위에 조선반도 출신자들도 가담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두 사실이지만, 이것을 인정하면 결국 일본이 현재 받고 있는 비난을 한국인도 받아야 합니다.

제가 아는 대만인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인은 대만인을 차별했다. 조선인은 장교를 시켰는데 대만인은 시키지 않았다." 실제로 추후에 쿠데타에 의해 한국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일본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군의 중위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조선반도 출신자들은 그래도 모두 일본군의 저변에 있던 이등병사였던 것이고, 책임있는 입장에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많은 조선반도 출신자들이 일본군의 전쟁범죄자로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일본이 전쟁 가해국이면 그 국민이었던 조선반도 출신자도 가해자입니다. 이 사실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명확하게 제시했습니다. 즉, 그들도 일본인으로서 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일본이 패전국이라면 한국인도 패전국민입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 본토의 일본인과 조선반도 출신자를 모시고 있습니다. 참배자들은 어느 나라 출신인지를 차별하지 않고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께 감사드리며 합장합니다.

만약 조선인 위안부가 ‘피해자’고 일본군이 ‘가해자’라고 한다면 일본 본토 출신의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조선반도 출신의 일본군, 즉 현재 한국인도 ‘가해자’라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한국인은 '위안소'를 이용한 자신의 형제나 아버지, 할아버지도 비난하고 아시아여성기금에 기부해야만 합니다.

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을 받아들이기 싫으니까 1919년부터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고, 일본과는 다른 나라였다, 특히 1941년부터는 별도 국가로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일본과 전쟁했다는 허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허구는 어디까지나 허구일 뿐입니다.


“한국의 '역사인식'은 근본부터 비뚤어져… 일본이 아무리 사죄해도 받아들여질 리 없어”

데일리신초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역사를 자세히 배우면 한국 역사와의 차이도 더욱 강하게 의식하게 될 것”이라며 “그것이 우호나 이해로 연결될지 쉽지 않은 문제”라고 말했다.

데일리신초는 마지막으로 아리마 데쓰오 교수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전하면서 기사를 마무리했다.  

 “많은 일본인은 전쟁 또는 식민지 지배로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라며 중국과 한국 사람에게 사과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비난을 하고 사과를 요구합니다. 게다가 그 요구가 점점 심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쯤에서 대개는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지경에 이르러도 나쁜 일을 했으니 일단 계속 사과하려는 어수룩한 일본인들이 많습니다.

인근 2개국(한국, 중국)은 원래, 앞서 소개한 역사 교과서의 내용대로 현대사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의 일반적인 '역사 인식’으로 사과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역사인식'은 근본부터 비뚤어졌고, 그들의 사정으로 그렇게 된 것이니 그 사정이 달라지지 않는 한 아무리 반성하고 사죄를 해도 받아들여질 리가 없습니다.”



* 본 기사의 번역은 박아름 씨의 도움을 받아서 이뤄진 것입니다.


[편집자주] 그동안 한국의 좌우파 언론들은 중국과 북한의 갓끈전술 또는 이간계에 넘어가 늘상 일본의 반공우파를 극우세력으로, 혐한세력으로만 매도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반공우파는 결코 극우나 혐한으로 간단하게 치부될 수 없는 뛰어난 지성적 정치집단으로, 현재 문재인 정권을 배출하며 중국과 북한에 경도된 한국이 경계하거나 대비해야할 것들에 대해서 국외자와 제 3자의 시각(또는 devil's advocate의 입장)에서 한국의 그 어떤 언론보다도 도움이 되는 얘기를 많이 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에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일본에도 아사히와 마이니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디어워치는 한국 외신 시장에서 검열되어온 미국의 자유보수 세력의 목소리는 물론, 일본의 자유보수 세력의 목소리도 가감없이 소개해 독자들의 국제감각과 균형감각을 키워드릴 예정입니다. 한편, 웹브라우저 구글 크롬은 일본어의 경우 사실상 90% 이상 효율 수준의 번역 기능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의 고급시사지라도 웹상에서는 한국 독자들이 요지를 파악하는데 전혀 장애가 없는 번역 수준입니다. 미디어워치는 한국 독자들이 일본쪽 외신을 접하는데 있어서, 편향되고 무능한 한국 언론의 필터링 없이 일본 언론의 정치적 다양성(특히 자유보수 세력의 목소리)과 뛰어난 정보력(특히 중국과 북한, 동아시아 문제와 관련)을 가급적 직접 경험해볼 것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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