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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폐기’ 없는 미북대화는 북폭 명분만 더할 것...걸프전의 교훈

미국의 대화는 곧 명분쌓기...미국, 걸프전 공습 개시 직전까지도 이라크와 대화노력

문재인 정권의 대북특사 파견을 계기로 미북간에 돌연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북폭이 어려워진 것 아니냐는 분석도 일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무력 사용에 앞서 이뤄지는 미국의 대화는 ‘양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명분을 쌓기 위한 것’이었던 역사가 있다. 걸프전쟁이다. 

1991년도 걸프전 당시 미국은 이라크를 공습하기 전까지 전쟁 준비를 착착 진행하면서도 여러차례 유화 제스처를 보였다. 심지어 당시 조지 부시 1세(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직접 사담 후세인에게 국무장관 상호 방문 대화를 제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달에 미국은 이라크를 공습했다. 공격전쟁 이전에 늘 안팎으로 대의명분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미국의 전통인 것. (관련기사 : 월스트리트저널(WSJ), “선제북폭은 법적, 도덕적으로도 정당”)



걸프전은 이라크가 1990년 8월 2일 인접한 산유국 쿠웨이트를 무력침공하면서 촉발된다. 8월 3일 미국의 요청으로 긴급 소집된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군의 즉각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은 쿠웨이트 침공 사태 즉시 항공모함과 해병대를 페르시아만에 급파한다. 대외적으로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는 무관”하다며 언론플레이를 한다.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우리나라에 항모를 연이어 파견하고 한미 연합훈련을 개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정기적인 방어훈련”이라고 언론플레이를 하는 최근의 미국과 판박이다. 

물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후세인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및 점령지를 포기하면 자신도 쿠웨이트에서 철군하겠다’는 뻔한 수작을 부리기도 한다. 마치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비핵화 하겠다’는 북한 김씨 3대의 수작과도 흡사하다. 

이런 후세인을 상대로 미국은 실제 무력사용 직전까지 여러차례 유화 제스처를 보였다. 우선,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직후 미국은 이라크를 향해 “쿠웨이트 이외 국가를 공격하면 군사력을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마치 ‘쿠웨이트 침공은 용인한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이라크를 안심시켜 놓고, 미국은 페르시아만으로 항모 인디펜던스호를 증파한다. 

미국은 1990년 8월 17일 해상봉쇄를 단행한다. 그러나 이라크 선박들은 미국 군함들의 정선 명령을 무시하고 항해를 계속한다. 미국 입장에서는 정선을 거부하는 민간 선박을 군함으로 공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불가피하다는 예측이 나오기 시작한다. 

북핵 위기에 맞서 미국이 주도한 대북경제제재 조치들이 중국의 비협조로 큰 효과가 없다는 회의론이 불거지는 현 상황과 오버랩되는 역사다. 지금 한미 자유보수 우파 진영에서는 북폭만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실정이다. 미국의 북폭 시점을 예측하는 기사와 논평이 쏟아진다. 

해상봉쇄 시점부터 대대적인 공습을 결행하기 전까지 약 5개월간 미국은 이라크를 향해 숱한 유화 제스처와 대화, 회담을 제안했다. 1990년 10월 14일 미국 베이커 국무장관은 페르시아만 사태와 관련 “외교적이며 정치적 해결책을 강력히 선호한다”고 립서비스를 했다. 10월 28일에는 미국 하원 민주당 소속의원 81명이 이라크 공격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심지어 미국은 이라크에 사실상 최후통첩을 하고도 대화를 제의했다. 11월 26일 미국이 주도한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1991년 1월 15일 이전까지 완전히 철수하지 않으면 필요한 어떠한 수단도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최후통첩이었다. 그래놓고 미국은 12월 1일 이라크에 대화를 전격제의한다. 



미국 부시 대통령이 먼저 양국의 당국자를 상호 파견하자는 제안을 한 것. 미국은 베이커 국무장관이, 이라크는 아지즈 외무장관이 각기 상대국을 방문하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대화 원칙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 대화가 “양보를 위한 방문”이 아니며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수라는 미국 측 요구조건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후세인이 ‘쿠웨이트에서 철군하라’는 미국 측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한, 처음부터 대화는 미국의 무력 사용을 위한 명분을 더해줄 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도 최근 북한 김정은의 대화 제의를 환영하면서도 ‘비핵화 원칙’을 강조하는 목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다. 펜스 부통령은 김정은의 대화제의과 관련 “비핵화를 향한 검증 가능하고 구체적인 조치를 보기 전까지는 북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재자였던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외국인 인질을 석방하고, 회담 날짜를 지연하고, 쿠웨이트 철군 최종시한 연기를 요청하는 등 갖은 꼼수를 부렸을 뿐이다. 유엔 사무총장도 나서서 미군은 페르시아만에서,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에서 동시철군하자는 중재안을 내놨지만 소용없었다. 

마침내 미국은 최후통첩 마감 시한(1월 15일)이 지나자마자 1991년 1월 17일, 이라크 공습을 개시한다. 걸프전에서 무력사용 작전을 지칭하는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작전의 개막이다. 이라크 공군은 개전 수 시간 만에 활주로에서 사라졌고, 이라크의 화학무기는 써보기도 전에 불타버렸다. 공습에 이어 미군과 다국적군은 2월 24일 지상군을 투입했고, 지상군 투입 100시간 만에 전쟁이 종결됐다. 

걸프전이 북한 김정은에게 주는 교훈은 핵 폐기라는 근본적인 해결을 배제한 어떠한 미북 대화도 북폭을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쿠웨이트 철군을 하지 않은 사담 후세인과 마찬가지로 독재자 김정은도 핵무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핵을 포기하는 순간, 체제 기반자체가 붕괴될 위험에 놓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정은에게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핵을 완전히 폐기한다면 북폭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대화 제의가 한낱 수사와 쇼로 끝나버린다면 결론은 후세인의 최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게 걸프전 역사가 알려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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