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 문제(朝日新聞の慰安婦報道問題)’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17)

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 2020.03.02 11:54:36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 문제(朝日新聞の慰安婦報道問題)’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0년 2월 29일판, 번역 : 황철수).


본 항목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한국어 번역) 항목, 위안부(慰安婦)(한국어 번역) 항목, 그리고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한국어 번역) 항목도 병행 참조해주기 바란다.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 문제

(朝日新聞の慰安婦報道問題)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 문제(朝日新聞の慰安婦報道問題)’란,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의한 위안부 보도와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을 말한다.



목차


1 경위

  1.1 요시다 세이지와 아사히신문

  1.2 기타 1980년대의 보도

  1.3 1991년의 보도

  1.4 1992년의 보도

  1.5 아사히신문에 의한 위안부 보도의 취소(2014)

      1.5.1 요시다 증언 기사의 취소

      1.5.2 여자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에 대해

  1.6 사죄회견

  1.7 신문 ‘아카하타’에 의한 취소·사죄

  1.8 아사히신문에 의한 ‘슈칸신초’ ‘슈칸분슌’ 광고거부·복자 문제


2 영향

  2.1 경영적 타격

      2.1.1 아사히신문에 의한 ‘위안부 문제’ 국제문제화에 대하여

  2.2 아사히신문의 우에무라 다카시 기사와 ‘여자정신대’


3 검증

  3.1 제3자위원회에 의한 검증

      3.1.1 독립 검증위원회


4 일본 국외로의 발신

 

 


1 경위(経緯)


1.1 요시다 세이지와 아사히 신문(吉田清治と朝日新聞)


1977년, 자신이 과거 전쟁 중에 육군노무보고회(陸軍労務報告会), 시모노세키(下関支) 지부동원부장(支部動員部長)이었다고 주장하는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가 한 책을 간행했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朝鮮人慰安婦と日本人)’(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来社))이라는 제목의 이 책에서 요시다는 군의 명령으로 제주도에서 여성을 강제연행해서 위안부로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요시다는 1982년에 다카기 겐이치(高木健一) 변호사가 주도한 재사할린(在樺) 코리안(조선인, 한국인) 소송에서도 제주도에서의 조선인 노예사냥을 증언했다. 하지만, 피고였던 일본 정부 대리인은 반대 심문을 하지 않았다. 아사히신문은, 1982년 9월 2일(오사카 판) 22면에서 “조선의 여성, 나 역시 연행, 전 동원지휘자가 증언. 폭행하여 강제로. 37년만에 위기감이 침묵을 깼다(朝鮮の女性 私も連行 元動員指揮者が証言 暴行加え無理やり 37年ぶり危機感で沈黙破る)”라고 보도했다.


또한 요시다는 1983년 7월에는 자신이 과거에 제주도에서 200명의 여성을 납치했다고 증언하는 ‘나의 전쟁 범죄 - 조선인 강제연행(私の戦争犯罪―朝鮮人強制連行)’(산이치쇼보(三一書房))을 출판했다. 또한 같은 해 1983년 12월에는 한국의 천안시에 사비(私費)로 사죄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방한해서 무릎을 꿇었다. 1983년 11월 10일 아사히신문은 조간 3면 ‘사람(ひと, 히토)’란에서 요시다의 사죄비(謝罪碑) 활동을 소개했다. 역사가인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도 요시다의 저작에 찬사를 보냈다.


1989년에 요시다의 저서가 한국에서 번역되면서, 제주도의  ‘제주신문(済州新聞)’은 1989년 8월 17일자로 허영선(許栄善) 기자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에서는 제주도 성산포의 한 85세 여성이 “그런 일은 없다. 2백50여가호밖에 안된 마을에서 열다섯명이나 징용해갔다면 얼마나 큰 사건인데... 당시 그런 일은 없었다”라고 밝힌 증언을 소개하고, 요시다의 저작을 두고 “뒷받침 증언이 없다”고 비판했다. 또 이 기사에서 제주도의 향토사가인 김봉옥(金奉玉)도 수년간의 추적 조사로서 요시다 증언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면서, 요시다의 책을 두고 “일본인의 악덕한 면을 드러낸 얄팍한 상술”이라고 비판했다.


1990년 6월 6일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노동성(労働省)의 시미즈 쓰타오(清水伝雄)가 “징용대상으로서 종군위안부를 연행했던 사실은 없으며, 민간의 업자들이 그러한 사람들(위안부)을 군(軍)과 함께 데리고 다녔다”고 발언했던 것이 한국에서 ‘시미즈 망언’으로 소란이 일어났고, 윤정옥(尹貞玉)은 정신대대책협의회를 결성,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수상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또한 일본 니혼(日本)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요시다 증언이 정대협의 기폭력(기폭제)이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옛 위안부 김복선(金福善)은 요시다 증언을 계기로 나섰다고 밝히고 있다.




그 후에도 한국, 필리핀, 대만 등에서, 옛 위안부였다고 나서는 여성이 다수 나타나고, 일본 변호사들의 요청으로,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소송(아시아태평양전쟁한국인희생자보상청구사건, 부산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공식사죄 등 청구소송, 재일한국인 전 종군위안부사죄·보상청구사건 등)이 여럿 이루어졌다.


1992년 3월에 역사가 하타 이쿠히코 교수는 제주도에서 현지 조사를 실시하여 성산포의 노인으로부터 “남자에 대한 징용은 있었지만, 위안부 사냥은 없었다”는 증언을 얻었고 제주신문 허영선 기자의 기사도 발견하였으며 이에 요시다 증언에는 근거가 없다는 것을 ‘산케이신문(産経新聞)’ 1992년 4월 30일, 또 ‘세이론(正論)’ 1992년 6월호에 발표했다.


그 후, 1996년에 요시다 본인이 “책에 진실을 써도 아무 이익이 없다”면서 사실과 창작을 섞어서 썼다고 밝혔다. 아사히신문은 1997년 3월 31일에 요시다의 “저술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는 기사를 게재했지만, 정정 기사는 내지 않았다.


이영훈(李栄薫)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요시다 증언은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적 기억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92년 7월 31일 한국 정부에 의한 ‘일제하 군대 위안부 실태 조사 보고서(日帝下軍隊慰安婦実態調査報告書)’에서도 요시다의 저서를 증거로 채택하고, 그 후에도 수정하지 않았다.


또한 1996년 유엔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Coomaraswamy Report, クマラスワミ報告)에서도 요시다 증언은 증거로 채택되었다. 2012년 9월 5일, 한국의 조선일보는 요시다의 수기를 다루면서 “이 책 한 권만으로도 일제의 위안부 강제연행은 입증되고도 남는다”고 주장했다.(조선일보, 2012년 9월 6일자 39면 칼럼, ‘[태평로] 조선인 위안부 '사냥'을 고백한 일본인’)


1.2 기타 1980년대의 보도(その他の1980年代の報道)


아사하신문 1984년 11월 2일자에 ‘나는 한때 종군위안부, 한국여성이 살아온 길(私は元従軍慰安婦 韓国婦人の生きた道)’이라는 제목으로, “방인(일본인) 순사가 강제연행했고, 21살에 고국에서 멀리 보내졌다”면서 과거 위안부였다고 주장하는 여성의 한 인터뷰 기사가 게재됐다.


또,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도 1987년 8월 14일 도쿄 지역 석간 13면에서 


“종군위안부란 구 일본군이 일중전쟁과 태평양전쟁 중에 전쟁터에 설치한 ‘육군오락소’에서 일한 여성들을 말한다. 쇼와 13년에서 종전까지, 종사한 여성들의 숫자는 20만 명에서 30만 명이라고 한다.” /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설명만 듣고, 어떤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 채 속아서,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처녀들도 많았다.” / “특히 쇼와 17년 이후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 일한병합으로 억지로 일본인 취급을 받고 있었던 조선반도의 처녀들이, 다수 강제로 징발되어 전장에 이송되었다. / 그녀들은,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의 임시로 설치한 오두막이나 참호 속에서, 하루 수십 명의 장병에 몸을 맡겼다. / 그 존재는, 세계 전쟁 역사상, 매우 이례적이며, 그 제도와 실태가 밝혀지지 않았다”


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연예면에 게재된 기사로, 게키단 유메야(劇団夢屋)라는 극단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 전승(伝承)에 근거한 연극을 한다는 취지로 작성된 것이다.


1.3 1991년의 보도(1991年の報道)


아사히신문은 1991년 5월 22일 오사카 판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억지로 동원(木剣ふるい無理やり動員)’이라는 기사에서 요시다 증언을 다시 소개했다.


그리고, 1991년 8월 11일에 ‘전 조선인종군위안부 전후 반세기 무거운 입을 열다(元朝鮮人従軍慰安婦 戦後半世紀重い口開く)’(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한국 특파원·서울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옛 위안부 김학순에 대해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 전쟁터에 연행되었다(女子挺身隊の名で戦場に連行され)”고 보도했다.




당시 도쿄 본사의 사회부 취재팀은 이치카와 하야미(市川速水) 기자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같은해 8월 15일 한국 한겨레신문에서는 김학순과 관련해 오히려 “부모가 딸을 팔아넘겼다”는 보도가 나왔고, 또 김학순 재판에서의 진술과 모순 등도 있어 일본 레이타쿠(麗澤)대학 객원교수인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는, 아사히신문에 의한 일련의 보도들이 오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에 의한 ‘종군위안부’ 보도는 한국에도 전해져, 반일감정을 고조시키고, 위안부 문제는 일한(日韓) 사이의 정치문제가 되었다.


또, 당시 한국에서는 1991년 10월 7일부터 1992년 2월 6일까지 MBC방송이 2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서 제작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방영되었으며, 최고시청률 58.4%를 기록했다. 그 줄거리는 주인공이 종군위안부로 일본군에 끌려가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일본군 병사가 위안소를 이용하거나 조선인 병사를 학대하는 장면이 방영되어 반일감정을 부추겼다. 원작은 김성종(金聖鍾)의 소설로, 1975년 10월부터 한국의 일간 스포츠신문에서 연재되었다.


같은해 10월 10일 아사히신문 오사카 판에서는 “위안부 중에는 유부녀가 많았고, 달라붙는 아이들과 억지로 갈라놓고 연행”했다는 증언도 보도했다.


같은해 11월 22일 홋카이도신문(北海道新聞)에서 요시다는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사냥과 같은 짓을 했다”고 말했다. 요시다는 한국과 미국에서 강연을 했으며, 해외 언론도 이를 보도했다.


1991년 12월 6일에는,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穂), 다카기 겐이치(高木健一) 변호사 등이 일본국에 위안부 보상을 요구한 최초의 손해배상청구 재판을 제소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 사건, 2004년 최고재판소에서 패소).


이를 아사히신문은 해당 소장에서 “부모가 팔아 기생이 되었다”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을 “일본군이 위안부를 여자정신대로 강제연행했다”고 바꿔써서 보도했고, 후쿠시마 등도 소장 내용을 “군에 연행됐었다”로 변경했다.


당시 NHK 직원이었던 이케다 노부오(池田信夫)에 따르면, 후쿠시마, 다카기 등은 원고(原告)로서 한국에서 김학순을 발굴했고, 후쿠시마가 NHK 에 이 이야기를 제공하면서 NHK의 스튜디오에서 김학순으로 하여금 “부모가 나를 팔아서 기생이 되었고, 양아버지에 의해 일본군 위안소로 갔다”는 내용으로 대사 지도까지 했다. 이 시점에서는 패전으로 인해 무효가 된, 군표로 지급된 위안부 급여에 대한 배상이 목적이었다.


1.4 1992년의 보도(1992年の報道)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의 방한을 앞둔 1992년 1월 11일, 아사히신문이 1면에서 ‘위안소, 군 관여 보여주는 자료(慰安所、軍関与示す資料)’ ‘부대에 설치 지시, 모집을 포함해 통제·감독(部隊に設置指示 募集含め統制・監督)’ ‘정부 견해 흔들린다(政府見解揺らぐ)’고 보도한다. 


이 자료는 ‘육지밀대일기(陸支密大日記)’ 중에서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가 ‘발견’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하타 이쿠히교 교수는 “육지밀대일기에 위안부 관련 서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날 아사히신문 석간에서는 ‘한국 언론이 아사히신문의 보도를 인용해 보도(韓国メディアが朝日新聞の報道を引用して報道)’라는 서울 지국전(支局電)을 게재했다. 이 자료에서 아사히신문은 종군위안부에 대해 “1930년대, 중국에서 일본군병사에 의한 강간 사건이 다발했기 때문에, 반일 감정을 억제하는 것과 성병을 방지하기 위해 위안소를 설치했다. 전 군인이나 군의(軍医) 등의 증언에 따르면, 개설 당초부터 약 80%가 조선인 여성이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에 들어가면서, 주로 조선인여성을 정신대의 명목으로 강제연행했다. 그 수는 8만∼20 만이라고 한다“는 해설을 했다. 이튿날 1월 12일 아사히신문은 사설을 통해 “역사를 외면하면 안된다”면서 미야자와(宮澤) 수상에게 “전향적인 자세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 ‘재팬타임즈(The Japan Times, ジャパン・タイムズ)’는 1월 11일 밤의 TV 방송에서 와타나베 미치오(渡辺美智雄) 외상(外相)이 “어떤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발언을 한데 대해서, “일본 정부 책임자가 전시 중에 일본군이 hundreds of thousands (수십만 명) 의 아시아인 위안부에 대한 강제매춘 (forced prostitution)을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1월 13일,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관방장관이 ‘사과와 반성(お詫びと反省)’ 담화를 발표했다, 1월 14일에는 한국에서 여자정신대를 오해 왜곡하여 “국민학교 학생까지 위안부로 만든 일제의 만행”(동아일보)이라고 보도했으며, 같은 날 미야자와 수상은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싶다”고 밝혔다. 


미야자와 수상은 1월 16일에는 천황의 인형이 태워지는 등 반일 시위가 고조된 한국을 방문하여 수뇌회담에서 여덟번을 사과했고, ‘진상규명’을 약속했다.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 서울지국의 시모카와 마사하루(下川正晴) 특파원은 “(한국의 대통령 수석 보좌관이 한국인 기자들에게 일본 수상이 사죄한 횟수까지 밝혔다.) 이렇게 국제적으로 무례한 기자 발표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일련의 아사히신문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 보도는, 요시다 본인에 의한 ‘증언은 창작이었다’는 고백, 그리고 우에무라 기자 기사의 실수 문제에 대한 지적 등이 나온 후에도 오랫동안 정정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사히신문은 2014년 8월에야 드디어 정정기사를 게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과는 아니었고, 아사히신문은 정정내용이 사회문제화가 되는 속에서 같은 해 9월에 신문사 사장이 참석한 기자회견에서야 재차 정정, 사과를 했다.


아사히신문이 장기간에 걸쳐 수정을 하지 않고 기사를 방치한 결과로서 국제사회가 ‘위안부 강제연행’을 기정사실화해버렸다고 질책하는 목소리도 나왔고, 그 책임을 묻는 소송도 이루어지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일찍이 1997년 3월 31일에 요시다의 “저술을 뒷받침하는 증언은 나오지 않았고,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는 기사를 게재했지만, 당시에는 정정기사를 내지는 않았다.


1.5 아사히신문에 의한 위안부보도의 취소 (2014)(朝日新聞による慰安婦報道の取消 (2014))


2014년 8월 5일, 아사히신문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 ‘위안부 문제를 생각한다(慰安婦問題を考える)’·‘독자의 의문에 답합니다(読者の疑問に答えます)’라는 제목의 검증기사(16-17면)를 게재했다.


1.5.1 요시다 증언 기사의 취소(吉田証言記事の取消)


아사히신문은 요시다의 증언을 허위라고 인정하고 기사를 철회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1982년 9월 2일 오사카 본사판 조간 사회면에서 요시다 관련 기사를 최초로 게재하였고 이후 확인된 것만으로 요시다 관련 기사를 16회 게재했다. 1992년 4월 30일, 산케이신문 조간에서 하타 이쿠히코 교수가 요시다 증언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고, 1997년 3월 31일의 특집기사를 위한 취재면회를 신청했으나 요시다는 거부하면서 “체험을 그대로 썼다”고 전화로 대답했다. 그 후 아사히신문은 요시다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이밖에, 2012년 11월, 자민당(自民党)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재가 일본기자클럽이 주최한 당수(党首) 토론회에서 아사히신문 오보에 의해서 사기꾼 같은 요시다의 책이 마치 사실처럼  세상에 전해져 문제가 확대되었다고 지적했다. 아사히신문은 그 내용을 순차 경과를 따라 기술하면서 “2014년 4~5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70대 후반에서 90대 분들을 약 40명 취재하였으나 강제연행했다는 요시다의 기술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얻을 수 없어 ‘‘제주도 연행’ 증언, 증거가 없어 허위로 판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아사히신문은 이어서 ‘독자 여러분들에게’라는 기사를 게재하여 “당시에는 허위 증언을 간파할 수가 없었습니다”는 내용을 실었다. 


또한, 요시다의 장남에 따르면 요시다의 아내는 애초에 일기(여기에 서부군의 동원명령에 대한 내용이 있다고 요시다가 주장했다)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 1993년 5월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中央)대학 교수와 만났을 때 “강제연행의 시점과 장소를 바꾼 적도 있었다”고 한다.


1.5.2 여자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에 대해(女子挺身隊と慰安婦の混同について)


아사히신문은 또한 같은 날짜 기사에서 여자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해서 보도했던 것을 당시의 연구부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6 사죄회견(謝罪会見)


2014년 9월 11일, 아사히신문사 사장 기무라 타다가즈(木村伊量)와 이사 겸 편집담당(모두 당시 직위)들이 과거의 기사 정정에 관한 사죄회견을 열었다. 


같은해 5월 20일 기사의 요시다 조서(吉田調書)에 관해 작업원이 명령을 위반하고 철수했다고 보도한 내용은 오보라고 정정했으며 회견으로 사죄했다. 또 같은 해 8월 5일 위안부에 관한 요시다 증언은 허위라고 정정보도한 후, 사죄회견이 없었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이 회견장에서 부수적으로 사죄했다. 또 이틀 후인 9월 13일의 사설 및 1면 칼럼에서도 사죄했다.


2014년 9월 29일, 아사히신문 조간은, 1982년 9월 2일 오사카 본사판 조간 사회면에서 요시다에 대한 기사가 처음으로 게재한 이후에 총 16회 게재되었으며, 첫 게재 시의 기자는 요시다의 강연을 듣고서 기사를 썼다고 하지만, 그 기자의 도항(여행) 기록에 의하면 강연 날짜에 일본에 없었다. 그 기자가 첫 기사를 썼다는 것은 틀렸으며, 두 번째 기사 이후 몇 차례 썼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다른 당시의 기자가 자신은 요시다에 대한 기사를 한 번만 썼고 첫 게재를 한 것은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밝히면서, 32년 전 기사 게재 당시의 기자가 누구인지 문제에 관해서 정정을 했다.


1.7 신문 ‘아카하타’에 의한 취소·사죄(しんぶん赤旗による取消・謝罪)


2014년 9월 27일, 일본공산당 신문 ‘아카하타(赤旗)’도 아사히신문 8월 5일의 특집 기사를 계기로 검증을 하고, 과거에 1992년부터 93년, 3회에 걸쳐서 ‘요시다 증언’이나 저서를 다루었지만, 신빙성이 없는 내용이었다면서 취소·사죄 기사를 게재했다.


또한, 아사히신문은 기사 이외에도 요시다 증언부터 사과까지의 기간에 ‘텐세이진고(天声人語, 아사히신문의 간판 칼럼 코너)’ 란에서 15회, 또 ‘코에(声, 독자 코너)’ 란에서 아사히신문의 주장과 일치하는 내용으로 480회에 걸쳐 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는데, 2014년 9월 13일 자 ‘텐세이진고’와 사설에서도 사죄했다.


아사히신문은 2014년 12월 23일 요시다 문제에 대한 취재를 통해 “두번 정도 조선반도에 갔고 ‘조선인 사냥’에 참여했다”고 보도한 기사 등 추가로 2개를 취소했으며, 아사히신문이 취소한 기사는 총 18개가 되었다.


1.8 아사히 신문에 의한 ‘슈칸신초’ ‘슈칸분슌’ 광고 거부·복자 문제(朝日新聞による「週刊新潮」「週刊文春」広告拒否・伏せ字問題)


아사히신문사는, 자사가 게재한 종군위안부 문제 기사에 대한 비판을 게재한 ‘슈칸분슌(週刊文春)’ ‘슈칸신초(週刊新潮)’(양쪽 9월 4일호. 8월 28일 발매=간토(関東) 기준, 이하동문(以下同文))의 광고 게재를 거부했다.


이에 대해, 분게이슌주(文藝春秋, ‘슈칸분슌’의 발행사)는 “해당 호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추궁 캠페인이 기재되어 있다”며, “신문의 애독자가, 해당 기사에 대한 광고 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 광고까지 접할 기회를 일방적으로 빼앗는 것은, 사회의 공기(公器)로는, 있을 수 없는 행위”라며, 항의문을 제출했다.


또 신초샤(新潮社, ‘슈칸신초’의 발행사)도 ‘슈칸신초’에 “아사히신문사의 사전에 ‘반성’ ‘사과’라는 단어는 없다!”라는 제목으로 비판 기사를 게재하고, 아사히가 광고 개제를 보류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고 해서 광고를 거부한다니 터무니 없다. 다음주 호에서 검증하겠다”고 홍보부가 언급했다.




그리고, 9월 11일호(9월 4일 발매)의 광고에 대해, 일부 복자(伏字, 인쇄물에서 구체적인 명기를 피하려고 공란으로 해두거나 ○·× 등의 기호로 나타내는 일)로 숨기는 방식으로 처리를 하여 게재하겠다고 아사히신문 광고국에서 연락이 왔다.


아사히신문은 ‘슈칸신초’에 대해서는 ‘매국(売国)’ ‘오보(誤報)’ 등의 문언을, ‘슈칸분순’에 대해서도 ‘부정(不正)’ ‘날조(捏造)’ 등의 문구를 각각 검은 동그라미 또는 흰 동그라미로 감추고 그 광고를 게재했다.


‘슈칸분슌’은 9월 11일호에서, 광고 거부 문제에 대한 비판 기사를 게재했다.



2 영향(影響)


2.1 경영적 타격(経営的打撃)


2014년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기자의 허위보도 문제가 폭로되고 또 도쿄전력(東京電力)의 요시다 조서(吉田調書) 오보 문제까지 겹친 아사히신문의 구독자 계약은 감소하고 있다. 2014년 6월, 740만부였던 계약수가 같은해 10월에는 약 700만부까지 감소했다. (일본ABC협회 조사) 


판매부수 감소 등으로 인해 같은해 9월의 중간 연결결산에서 영업이익이 50.5% 감소했다. 아사히신문사 홍보부는 위안부 보도 및 원자력발전소 보도 문제의 영향으로 “중간 결산에서는 영향이 한정적이었으나 연간 결산에서는 일정 정도의 영향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오랫동안 아사히신문 판매부문을 담당했으며 신(新) 체제하에서 회장직에 취임한 이이다 신야(飯田真也)는 신문판매소 및 거래처로부터 엄격한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2.1.1 아사히신문에 의한 ‘위안부 문제’ 국제문제화에 대하여(朝日新聞による「慰安婦問題」の国際問題化について)


아사히신문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 기사는 요시다 세이지가 자신의 저서를 날조라고 인정한 후에도 오랫동안 정정되지 않았으며, 위안부 강제연행이 국제 문제화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대신(総理大臣)도 아사히신문을 지명하여 비판했다.


2.2 아사히신문의 우에무라 다카시 기사와 ‘여자정신대’(朝日新聞の植村隆記事と「女子挺身隊」)


1996년 요시다 세이지가 자신의 증언에서 ‘시간’과 ‘장소’가 허구임을 밝히면서, 위안부 강제연행의 큰 근거가 되어왔던 ‘요시다 증언’의 신빙성이 흔들리게 된다.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하지 않았던 보수논객(니시오카 쓰토무)은 요시다 증언을 크게 다루어 왔던 아사히신문에 대해서 이제까지의 위안부 보도에 사실왜곡이 있었다고 비판했다. 특히 기사를 집필한 아사히신문 기자인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가, (분명 한국어를 잘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학순의 한국어 증언에 포함된 ‘기생’(공창) 출신이라는 것은 쓰지 않고, 실제로는 발언한 바가 없었던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 전쟁터에 연행됐다”고 기사를 쓴 것은 의도적인 정보조작이라고 지적했다.*


[* 편집자주 : 니시오카 쓰토무가 우에무라 다카시의 고의적 왜곡을 의심하는 이유는, 우에무라 다카시가 김학순과 관련하여, 어렸을 적에 이미 생모에 의해 기생 양성소에 팔렸던 사실, 그리고 양부에 의해서 일본군 위안소로 갔었던 사실, 이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을 은폐하고 오히려 김학순 본인은 전혀 발언하지도 않은, 국가동원과 관련된 기구 이름(‘여자정신대’)을 아무 맥락도 없이 자기 보도에 끼워넣었기 때문이다. 니시오카 쓰토무는 우에무라 다카시가 바로 이런 곡필을 통해서, 당시까지도 영향력이 있었던 요시다 세이지에 의한 ‘인간사냥’, 강제연행 주장에 뒷받침을 해주고, 또한 동시에 한국인 장모인 당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이사 양순임이 이후 김학순 등과 함께 제기하게 된 일본 정부 대상의 재판에서 유리하게 작용토록 미리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2019년 6월 26일, 도쿄지방재판소 재판에서 니시오카는 이런 문제가 쟁점이 된 우에무라와의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했다. 이 재판에서 니시오카의 추론이 일정한 합리성(상당성)이 있다는 점도 인정받았다. 니시오카는 2020년 3월 3일, 도쿄고등재판소 2심에서도 우에무라에게 승소했다.(2020.3.3.)]


이러한 비판을 받으면서 ‘아사히신문’의 축쇄판(縮刷版, 축소인쇄판)은 같은 기사에 대해서 12일 자로 “‘여자정신대’ 명목으로 전장에 끌려갔다”는 부분을 삭제했다.


2014년 8월 5일에 이르러, 아사히신문은 ‘여자근로정신대(女子勤労挺身隊)’가 ‘위안부(慰安婦)’와는 전혀 다른 것이 맞다고 설명하면서, 다만 당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고, 기자가 참고로 한 자료 등에 위안부와 정신대의 혼동이 있었기 때문에 기자(우에무라 다카시)가 오용(誤用)을 해서 보도했다고 설명했다. 그 후, 우에무라와 그 가족에 대한 협박이나 비판이 쇄도했다.




우에무라 다카시는 ‘분게이슌주(文芸春秋)’ 2015년 1월 호에 ‘위안부 문제 날조기자로 불리고서(慰安婦問題捏造記者と呼ばれて)’라는 제목의 수기를 발표했다. 우에무라는 이 수기를 통해 김학순에 대한 취재 경위나 녹음 테이프의 내용 등을 상세히 쓰고서, 니시오카 쓰토무가 지적한 ‘장모에 의한 정보제공설’을 부정하고, 또 이와 별개로 장모의 사기혐의는 결백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대해) 요미우리신문, 슈칸신초 등이 속여서 취재를 했으며 도촬(盗撮) 등이 있었음을 주장했다.


[* 편집자주 :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아내는 한국인으로, 그 장모(丈母)가 바로 양순임(梁順任)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장(1990년대부터 대표 역임)이다. 양 회장은 '대일민간청구권 소송단'을 만든 뒤 일본을 상대로 돈을 받을 수 있다고 꼬드겨 2011년 초까지  태평양전쟁 강제동원 희생자 유가족을 상대로 총 15억 여원의 돈을 뜯는 사기를 벌인 혐의로 2013년도에 구속기소됐으나 최종 무죄로 풀려났다. 하지만, 양 회장에 대한 무죄 선고에 대해서는 논란도 있다. 정작 공모혐의로 같이 구속기소됐던 장 모(某) 씨는 유죄, 5년 6개월(2심)의 실형을 최종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심 재판부는 양 회장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양 씨는 장 씨의 종전 행태에 비춰 그가 사기 행각을 벌일 수 있다는 점을 예상하고 이에 대한 통제·예방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면서 “이런 조치를 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유족회 이름을 장 씨에게 빌려줘 범행의 명분을 제공했다. 도덕적, 민사적 책임을 추궁할 여지는 있다”고 판시하기도 했다.]


아사히신문은 오랫동안 이런 지적을 묵살해왔지만, 2014년 8월, 회사의 위안부 보도를 검증한다면서 요시다의 증언에 근거한 기사들과 우에무라의 기사들을 취소했다. 이 기사들의 취소는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아사히신문은 같은해 9월에 사장이 참석한 기자회견을 열고서 경위를 설명하고 사죄하기에 이르렀다.



3 검증(検証)


3.1 제3자위원회의 검증(第三者委員会による検証)


아사히신문이 일련의 자사 보도 문제 검증을 위해 발족한 ‘제3자위원회(第三者委員会)’는 “일본군이 집단적, 폭력적으로 여성을 납치했다”는 이미지를 아사히신문이 정착시켰다는 증거가 결정적이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있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과격한 언설을 아사히신문 및 기타 일본 언론들이 뒷받침하여 한국에서의 비판을 과격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제3자위원회’의 보고에 대해서는 자기변호가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왔는데 국내외 언론사들은 그 보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의 보도가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친 경위에 대하여 요미우리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에 게재된 요시다 증언은, 역시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가 쓴 위안부 강제연행 기사와 함께 한국의 언론들이 다루었고 1990년대 후반부터 이 문제가 국제사회에도 확산되었다. 요시다 증언을 채용한 국제적 결의 및 보고는 1996년의 유엔인권위원회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1998년의 맥두걸 보고서, 2007년의 미국 하원 121호 결의안 등이 있다. 


국제문제화하는 과정에 있어서 아사히 보도를 한국 언론사들이 인용하여 보도함으로써 한국 여론의 일본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이 상황을 아사히가 다시 일본에서 재보도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아사히와 한국 언론, 여론에 의한 일종의 ‘공명(共鳴)’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나타났다.


3.1.1 독립 검증위원회(独立検証委員会)


또한 2015년 2월 19일,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를 외부에서 검증해 온 ‘아사히신문 ‘위안부 보도’에 대한 독립검증위원회(朝日新聞『慰安婦報道』に対する独立検証委員会)’가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보도를 ‘강제연행 선전(宣伝)’이라고 했으며, 이 선전으로 인해 국제사회에 잘못된 사실이 확산되면서 일본의 명예를 훼손시켰다고 했다.



4 일본 국외로의 발신(日本国外への発信)


‘재팬포커스(Japan Focus, ジャパン・フォーカス)’誌 데이비드 맥닐(David McNeil, デイビッド・マクニール)의 취재에서 아사히신문 특파원 미즈노 타카기(ミズノ・タカキ)는 “There were many soldiers ‘accounts predating Yoshida’s memoir”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문제 보도에 대한 외부의 비판을 조롱(scoffs)하고, 위안부 문제 보도에 있어서 아사히신문에 동조하지 않았던 각종 언론에 대해서 “Japanese journalists should be ashamed that we did not report it until 1991”고 말했다.


아사히신문 영어판은 2017년 10월에 발신한 기사에서, 위안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Comfort women is a euphemism used to refer to those who were forced to provide sex to Japanese troops before and during World War II. Many of the victims were from the Korean Peninsula, which was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from 1910 to 1945.”


AJCN(Australia-Japan Community Network) 대표 야마오카 데츠히데(山岡鉄秀)와, 캘리포니아주 변호사로서 전 탤런트인 켄트 길버트(Kent Glibert, ケント・ギルバートに)는 ‘아사히신문 영어판의 ’위안부’ 인상조작 중지를 요구하는 유지들의 모임(朝日新聞英語版の『慰安婦』印象操作中止を求める有志の会)’을 결성했다. 이들은 아사히신문 영어판 기사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잘못된 기술로 인해서, 재외교포 및 일본계에 대한 괴롭힘 등 실질적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2018년 7월 아사히신문에 대해서, 영어판 기사에서의 오해를 초래할 우려가 있는 표현 수정 등의 대응을 요구한 1만 명 이상의 서명과 공개질문장을 제출했고, 훗날 아사히신문사의 공식적인 회답을 얻었다고 한다.


2018년 8월, 아사히신문의 헤이세이 26년 8월 5일자 조간 특집 ‘위안부문제를 생각한다 상(慰安婦問題を考える 上)’에 게재된 기사의 영어판 소스에, 검색 엔진에 의해서 사이트가 표시되는 것을 억제하는 ‘noindex ’ ‘nofollow ’ ‘noarchive’의 3개 메타 태그가 삽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발각된 계기는, 켄트 길버트가 위에 언급한 기사 정정 요구를 했을 당시 아사히신문에 영문(英文)으로 된 고지(告知)를 요청한 것과 관련된다. 켄트 길버트가 아사히신문 측으로부터 “2014년 8월 5일 자 기사의 영어판은 ‘아사히신문 디지털’에서 2014년 8월 22일에 게재했고, 현재도 하기(下記) URL에서 전문(全文)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는 답변을 받았음에도, 정작 URL을 확인하고 검색 엔진에서 문제 기사를 검색해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켄트 길버트는 이 경위를 동영상 등에서 밝혔고, 시청자들에 의해 메타 태그의 존재가 지적되었다.


아사히신문 홍보부는 이와 같은 설정이 되어있었던 것에 대해, “2014년 8월 22일에 위안부 관련 영문 기사를 복수(複数)로 나눠, 디지털 편집부가 송신했습니다. 공개 전에 기사를 최종 확인하기 위해 일단 회사 내에서만 열람할 수 있는 상태로 송신한 것이고, 확인을 끝낸 후 검색 가능한 상태로 했었습니다. 그 때, 2개 태그 설정에 대한 해제 작업이 빠져버렸던 것입니다. 현재는 수정했습니다”고 회답했다.


이 문제는 8월 28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당시)의 정례 기자회견에서 질의응답이 이루어지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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