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재일조선인 귀환사업(在日朝鮮人の帰還事業)’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12)

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 2020.01.23 20:44:59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재일조선인 귀환사업(在日朝鮮人の帰還事業)’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0년 1월 23일판, 번역 : 황철수).

본 항목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니가타 일본 적십자센터 폭파 미수 사건(新潟日赤センター爆破未遂事件)’(한국어 번역) 항목도 병행 참조해주기 바란다.



 

‘재일조선인 귀환사업(在日朝鮮人の帰還事業)’이란, 1950년대부터 1984년에 걸쳐 진행된,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조선인과 그 가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조선)으로의 집단적인 영주귀국 또는 이주를 말한다.

북조선에서는 ‘귀국사업(帰国事業)’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在日本朝鮮人総聯合会, 조총련)가 추진한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귀국운동(帰国運動)’ 또는 ‘귀환운동(帰還運動)’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한편, 조총련과 대립 관계에 있던, 대한민국(이하 한국)계의 재일교포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る在日本大韓民国居留民団)의 입장에서는 ‘북송사업(北送事業)’이라고 칭하고 있다.



목차


1 개요


2 배경

2.1 재일조선인

2.2 북한

2.3 일본

2.4 한국


3 일본 언론


4 경과


5 니가타 적십자 센터로 이동


6 ‘지상낙원’과 귀국자의 그후


7 영화 ‘동해의 노래’


8 평가


9 참고문헌


10 관련문헌

 



1 개요(概要)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머물던 같은 동포의 자국 수용은 거부하면서, 대신에 다케시마에서 살상, 납치한 일본 어부들과의 교환 조건으로서 같은 동포 범죄자를 석방시키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이 자신들을 ‘전승국(戦勝国)’ 국민이라고 주장하는데다가 전후에 더 민족주의적이고 공산주의에 친화적이면서, 일본인보다도 더 큰 권리를 주장하고 있어서 이에 대한 대응에 고심하고 있었다. 재일조선인들 중에서 ‘나가타 구청 습격 사건(長田区役所襲撃事件)’, ‘피의 메이데이 사건(血のメーデー事件)’ 등 일본국내 소수파인 좌익과 결탁하여 폭동에 가담하는 이, 또 범죄를 일으키는 이가 인구 비율에 대하여 통계적으로 많았던 것도 이 재일조선인 귀환사업의 배경이다.

이와 같이 자국 수용을 거부하고 재일동포의 귀국을 반대하는 한국 정부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에 있는 동포를 자금 및 기술 자원에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적극적으로 재일동포 문제에 관여하면서 일본에 조선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북조선은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동포를 대접함으로써, 동포 여론의 다수파를 북조선 지지로 유도하는데 성공했다. 자금을 제공하는 대신에 조선학교에서 민족주의로서 북조선 지지 교육을 시켰고, 이에 재일동포 중에는 북조선과 조총련을 지지하는 사람이 더욱 증가했다. 현재도 일본에 한국 학교가 더 적은 배경에는, 이승만에 의한, ‘귀국 반대 / 민족주의 지지(帰国反対/民族主義支持)’라는 모순된 대(対) 재일동포 대책이 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 측에 “귀국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희망자를 한국으로 귀국시키고 싶다”고 제의했지만, 한국은 그 후에도 민단(民団)에 지시하여, 일본 거류라는 명목으로 재일동포를 귀국시키지 않겠다는 자세를 계속 취했다. 동구권으로서, 한국과는 대립하는 입장에 있었던 북조선은 재일동포의 유용성을 눈치 채고, 대담하게 ‘순차(順次)’ 수용 방식을 일본 측에 제안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여전히 귀국하지 않는 친족에 대해서도 앞서 귀국한 이를 인질로 삼아, 돈과 기술을 북조선에 보내게 하거나, 대남·대일 스파이 역할을 시키거나 하는데 성공했다.

일본과 북조선은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귀국에 관련된 실무는 일본 적십자사와 조선 적십자회의 일조(日朝) 양국 적십자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1959년 12월 14일에 최초 귀국선이 니가타(新潟) 현 니가타항에서 출항한 것을 시작으로, 귀국사업은 몇 차례 중단되기도 했으나 1984년까지 계속되었다. 총 93,340명이 북조선으로 도항(渡航)했으며, 그 중 적어도 6,839명은 일본인 처와 피보호자 등 일본 국적 보유자였다. 또 재일조선인은 일본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반도 남부 출신이 많았기에, 그들에게는 북조선은 조국이기는 하지만 타향에로의 귀환이 되어 버렸다.

귀국선 비용은 북조선 정부가 부담했고, 사업의 후기에는 북조선의 배인 만경봉호(万景峰号, 초대(初代))도 사용됐다. 일본과 북조선 사이를 자주 왕래했던 귀국선은 북조선에서 조총련에 대한 지도·연락을 비롯해 대일본·대한국 공작원 송출 등의 첩보 활동에도 이용됐다.


2 배경(背景)

2.1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

재일조선인 중에서는, 조선반도의 일본통치시대(1910-1945년)에 다양한 사정으로 일본 본토로 건너간 사람, 또 한국정부에 의한 학살(제주도 4·3사건)에서 도망쳐서 건너왔거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돈벌이를 위해서 들어오거나, 그리고 ‘조선전쟁(한국전쟁)’의 발발 등으로 스스로 밀입국하여 그대로 일본에 거류하게 된 사람이 많았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조선전쟁으로 인한 특수 등의 혜택을 누린 사람도 있었지만, 여전히 생활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많았다. 특히 1956년(쇼와 31년)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생활보호비 절감 정책과, 1957년(쇼와 32년)부터 다음해 1958년(쇼와 33년)에 걸친 ‘냄비 불황(なべ底不況)’이 빈곤층의 생계를 직격했었다.

한편, 재일조선인 사이에서는, 한국은 조선전쟁이 남긴 폐허에서의 부흥이 원활치 않은데다가 또 정치 불안이 있다는 이유로 귀국을 걱정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천리마 운동에 의해 급속한 부흥을 실현했다”고 하는 북조선에 동경을 품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국의 북조선과 자본주의국의 한국의 체제간 경쟁은 북조선이 우위에 있었으며*, 조총련은 북조선을 “지상낙원” “의식주 걱정이 없다”고 선전하고, 이에 부응한 일본의 진보적 문화인·혁신 정당·혁신 단체가 되풀이 북조선의 경제 발전의 모습을 전하고, 재일조선인에게 귀국 결의를 촉구했다.

[ *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 북조선은 소련의 풍부한 경제 원조에 의해 중공업, 댐 건설 등의 인프라 정비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한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

특히 북조선을 방문하고 예찬한 데라오 고로(寺尾五郎)의 ‘38도선의 북쪽(38度線の北)’이 귀국 희망자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재일조선인들이 당시 일본에서의 민족차별, 특히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를 고려했던 것도 북조선에로의 귀국·이주를 선택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폭발적인 귀국운동의 확대 요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2.2 북조선(北朝鮮)

북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와의 대화 채널을 확보하고, 또 이를 일조(日朝) 국교정상화의 계기로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진행되고 있던 일본과 한국의 국교정상화(일한기본조약체결)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재일조선인의 ‘북송(北送)’을 이유로, 일한회담은 한 번 이상 중단됐다.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 국가로의 집단적 이주는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는 효과도 있었다. 북조선은 귀국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총련을 그 지도하에 두는 한편, 사업을 추진한 일본 측 지원자를 통해 북조선의 ‘실적’을 선전함으로써, 북조선 지지 운동을 일본에서 확산시킬 수 있었다.

또, 조선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기 위한 인력 보충도 목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북조선 측의 정책 자료에 일본에서 귀환한 조선인의 영향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나, 또 북조선 귀환자 중에는 노동력으로 기대할 수가 없는 부양 세대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토 재건을 위한 인력 보충을 이러한 대규모 이주를 추진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의문시 하는 의견도 있다.

2.3 일본(日本)

일본정부는 1955년(쇼와 30년) 말부터 재일조선인의 대량 귀국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으로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생활보호비 부담*, 재일조선인의 높은 범죄율(일본인의 6배였다), 그리고 재일조선인과 일본의 좌익운동의 연계에 대한 우려를 들 수 있다.

[ * 1955년 재일조선인의 평균 (생활) 보호율은 24.06%로, 일본(2.15%)의 11배 이상이었다. 1956년부터 57년까지 법무성이 실시한 생활보호 삭감 조치 후인 1958년 10월 시점에서도 재일조선인의 평균 (생활) 보호율은 13.3 %로, 일본 (1.8 %)의 7배 이상이었다. ]

‘재일조선인귀국협력회(在日朝鮮人帰国協力会)’ 결성 당시 일본 측 대변인이 된 것은 일조협회(日朝協会)로서, 여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이들에는 일본사회당 의원, 일본공산당 의원 뿐만이 아니라,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등 자민당 의원도 있었다. 당파를 넘은 참여와 추진이 이뤄졌다. 일본사회당계・일본공산당계의 관계자가 귀국사업에 임한 배경으로는, 북조선의 사회주의를 선전함으로써, 일본에서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노린 부분이 크다.



1958년 1월자 ‘조선의 소리’에 따르면,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는 1957년 12월 31일에 그간 억류되었던 북조선인 약 1,700명 중 500명은 일본국내에서 해방하고, 또한 나머지 1,200명은 한국에 강제송환키로 합의했다. 하지만, 북조선민주법률가협회(北朝鮮民主法律家協会)는 이를 거주 이전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며 국제법 위반이라고 하면서, 다음 달에 일본국제법률가연락협회(日本国際法律家連絡協会) 회장 나가노 구니스케(長野国助)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2.4 한국(韓国)

한국은 조선전쟁이 남긴 폐허에서의 부흥이 낙후된 데다가, 특히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인구가 너무 증가해서 재일조선인 수용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귀국사업에 대해서는 ‘북송(北送)’이라고 부르면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자국의 관할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면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 함께 강경하게 반대했다.

1959년(쇼와 34년), 일조(日朝) 양국 적십자사에 의한 협상의 진전이 드러나자, 한국정부는 일한(日韓) 회담(제4차) 중지와 일본인 어부 억류의 계속, 그리고 무역 단교 등을 선언했다. 이에 일한 국교정상화 교섭도 일시중단 상태에 빠졌다. 한국 정부는 동시에 대량의 테러 공작원을 일본에 보내 폭파 테러를 기획하기도 했다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

한국정부의 이와 같은 반발은 ‘거주지 선택의 자유(居住地選択の自由)’라는 인도주의를 존중하는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후, 한국정부는 북조선에 맞서서 한국에로의 귀국사업을 추진하려고도 했지만, 귀국이나 정착에 관한 비용은 일본에 부담토록 요구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3 일본의 언론(日本のマスコミ)

당시 북조선의 실정에 대한 현지 취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의 언론에는 소련의 원조로 급성장하는 북조선과 대비하여 일본에 밀항해 일본 적십자사, 열차, 선박을 폭파하려는 한국정부에 의한 테러 공작원 사건(니가타 일본 적십자센터 폭파 미수 사건)이 적발되어 ‘테러 국가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 주연의 영화 ‘큐폴라가 있는 거리(キューポラのある街)’에 지인의 북조선 귀국을 기뻐하는 장면이 나오듯이, 일반 일본인조차도 북조선 귀국 사업에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편집자주 : ‘큐폴라’는 무쇠를 녹이는 가마, 용해로를 말한다) 이 때문에 당시 일본 언론은 좌우를 불문하고 귀국사업을 인도적 사업으로 파악하였고 각 신문은 일제히 귀국사업을 환영하고 동참하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1959년 12월 24일자 산케이(産経)신문의 ‘따뜻한 숙소와 마중 / 제2차 귀국선, 눈내리는 청진 입항 / 세심한 배려의 수용(暖かい宿舎や出迎え/第二次帰国船雪の清津入港/細かい心づかいの受け入れ)’, 그리고 1960년(쇼와 35년) 1월 9일자 요미우리(読売)신문의 ‘북조선에 돌아간 일본인 처들의 ‘꿈같은 설날’이 정말 와서 좋았다(北朝鮮へ帰った日本人妻たち「夢のような正月」ほんとうに来てよかった)’, 그리고 1960년(쇼와 35년) 2월 26일 자 아사히(朝日)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되었다.

“귀환 희망자가 늘어난 것은 무엇보다도 ‘완전 취업, 생활 보장’이라고 전해진 북조선의 매력 때문인 것 같다. 각지의 재일조선인 대부분은 귀환 실시까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부족한 일본의 생활에 실망하면서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일본을 떠나 ‘미지의 고국’으로 건너갈 결단이 어려웠던 듯 하다. 그런데, 제1선으로 돌아간 사람들에 대한 환영 모습이나, 완비된 수용 태세, 그리고 눈부신 부흥 모습 등이 보도되고, 또한 ‘밝은 일상생활’을 전하는 귀환자들의 편지가 전해졌기 때문에, 결국 귀환을 결단한 것 같다.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당시)의 이치카와 하야미(市川速水) 기자는, “과거에, 남한의 군사정권과 대비했을 때 ‘남한은 안된다, 북한은 좋다’고 하는 식 논조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북조선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에다가 속죄의식 뿐만 아니라 ‘나쁜 남한과 대치하고 있다’는 측면도 더해져서 판단력이 둔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귀국 사업에 아사히신문도 가담했습니다. [...] 나 자신이 1950, 60년대에 기자라면, 어떠했을는지,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라면서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4 경과(経過)

- 1946년

12월 26일, 북조선 정부, 임시인민위원회 결정 제139호 ‘일본에서 귀국하는 조선인민에 관한 건’ 공포.

-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한국전쟁) 발발.

- 1953년

7월 27일, 조선전쟁 정전(停戦).

- 1955년

2월, 북조선의 남일(南日) 외상이 일본에 국교정상화를 호소.

5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결성.

7월 15일, 조총련 주최로 ‘조선인 귀국희망자 도쿄대회’가 개최된다. 전국의 귀국 희망자 415명, 그 중 도쿄가 100명이라고 발표.

- 1956년

2월 27일, 일조(日朝) 양국 적십자사가 평양에서 공동성명서에 조인.

4월 6일, 48명의 재일조선인이, 북조선 재류일본인의 일본 귀환선 코지마마루(小島丸)가 가는 길에 편승을 요구하면서 일본적십자사 앞에서 농성을 한다.

4월 30일, 방일 중이던 적십자국제위원회 대표가 북조선 귀국을 호소하는 재일조선인을 목격. 다음날부터 재일조선인 문제에 관한 정보수집을 시작한다.

6월 18일, 일본적십자사에서 농성을 하고 있던 재일조선인이, 영국의 해운회사 버터 필드 앤 스와이야(バタフィールド・アンド・スワイヤ) 사 소속의 선박으로 북조선에 가는 것을 승낙, 농성을 푼다.

6월 2일, 북조선이 내각 명령 제53호 “일본에서 귀국하는 조선 공민의 생활 안정에 관해서”를 공포. 코지마마루를 통해서 귀국을 요구한 재일조선인에 대한 대응을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월 5일, 일본 적십자사에서 농성을 하고 있던 재일조선인이, 도쿄를 떠나 미이케(三池)로 향한다.

7월 7일,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버터 필드 앤 스와이야 사의 호남호(湖南号)가 미이케항 기항을 취소.

7월 16일, 적십자국제위원회가 일본·북조선·한국 적십자에 대해서 재일조선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적십자국제위원회가 기여하는 것을 제안했다. 편지·각서의 형태로 이듬해까지 수차례.

12월 6일, 코지마마루에 승선을 요구하고 농성을 한 자 중 20명이 노르웨이 선박 하이리호(ハイリー号)를 타고, 모지(門司) 항과 상하이 경유로 북조선에 귀국한다.

- 1957년

3월 31일, 코지마마루에 승선을 요구하고 농성을 한 사람 중에서 나머지 28명이 일본 어선에 타고 북조선 청진항에 도착한다.

10월, 제19회 적십자국제회의가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다. 각국의 적십자사에 이산가족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고, “온갖 수단을 다하여서, 이 어른과 아이들이, 본인의 의사에 따라,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거주지에 상관없이, 가장으로 인정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그 가족과 재회하는 것을 쉽게 하도록” 책임을 부과하는 것을, 결의 제20으로 채택한다.

- 1958년

1월 21일, ‘조선의 소리’가 “북조선민주법률가협회가 일본국제법률가연락협회의 회장 나가노 구니스케에 보낸 서한”의 내용을 방송했다. 앞서 31일 일본정부와 한국이 억류자 1200명의 한국에로의 강제 송환을 결정한 것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하는 항의 내용이 언급되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다음날, 라디오 프레스(ラヂオプレス)가 RP뉴스(RPニュース)를 통해 이것을 보고했다.

3월 18일,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재일조선인문제를 심의.

6월 26 - 7월 6일, 나가사키(長崎) 현 오무라(大村) 입국자 수용소(현재 오무라 입국관리센터)에서 북조선 귀국 희망자가 단식 투쟁을 한다.

7월 14 - 15일, 김일성, 소련 대리 대사 V · I · 뻬리셴코(ペリシェンコ)와 회담. 김일성이 재일조선인의 수용 의사를 나타냄과 동시에, 소련에도 지원을 요청한다.

8월 11일, 가나가와(神奈川) 현 가와사키(川崎) 시의 조총련 분회가 김일성 수상(당시)에 귀국을 탄원하는 편지를 보내는 것을 결의했다. 이는 집단적인 귀국운동의 효시로 여겨지고 있다.

9월 8일, 김일성이 재일조선인의 귀국을 환영한다고 언명.

9월 16일, 남일(南日)이 ‘재일조선공민의 귀국문제와 관련하여’라는 성명을 발표.

10월 16일, 북조선의 김일(金一) 제1부수상이 귀국문제에 관련한 담화를 발표한다. 그 중 귀국에 필요한 선박 제공을 명언한다.

11월 17일, ‘재일조선인귀국협력회(在日朝鮮人帰国協力会)’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회장)의 결성총회가 중의원 제1 의원 회관에서 개최.

‘주오코론(中央公論)’ 12월호 ‘재일조선인 60만의 현재(在日朝鮮人六十万の現在)’에, “한국의 빈곤이 믿지 못 할 빈곤이라면, (북조선) 공화국의 부흥, 건설의 속도도 일본의 상식으로는 거의 믿지 못할 기세인 것 같다”는 기사가 게재됨.

- 1959년

1월, 다무라 시게루(田村茂)가 유라쿠쵸(有楽町)에서 사진전 ‘새로운 중국과 조선(新しい中国と朝鮮)’을 개최했다. 이 사진들을 보고 귀국을 결심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2월 16일, 북조선이 내각결정 제16호 ‘일본에서 귀국하는 조선공민의 환영에 즈음하여’를 결정.

2월 13일, 일본정부가 재일조선인의 북조선 귀환에 관한 각의 승인을 한다.

4월 10일, 데라오 고로의 ‘38도선의 북쪽’이 발매.

5월 28일, 유(柳) 한국대사가 재일조선인 귀환사업을 무력으로 저지하겠다고 제의.

6월 15일, 한국이 귀환사업에 대한 대항으로서 대일 통상 단교를 선언.

8월 13일, 인도 캘커타에서, 일본 적십자사의 가사이(葛西) 부사장, 조선적십자회 리일경(李一卿) 부사장 간에서 ‘일본적십자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 간에서의 재일조선인의 귀환에 관한 협정’(캘커타 협정)이 체결된다.

8월 25일, 민단원이 ‘북송’에 반대하고 일본적십자사 본사에 난입.

9월 7일, 동일자 주간 ‘조선총련(朝鮮総連)’에 ‘지상낙원’(地上の楽園)이라는 단어가 게재됨.

12월 4일, 니가타 일본 적십자센터 폭파 미수 사건으로 한국인 테러 공작원 2명을 체포(12월 5일 신문 각지). 그 후에도 한국인 테러 공작원 적발이 계속된다.

12월 10일, 제1차 귀국단을 운반하기 위한 전용열차가 시나가와(品川) 역을 출발. ‘비가 내리는 시나가와 역(雨の降る品川駅)’의 저자 나카노 시게하루가 배웅했다, ‘무명으로 감은 기타(木綿でまいたギター)’에 이를 저술했다.

12월 14일, 제1차 귀국선이 니가타 항을 출항.

12월 16일, 제1차 귀국선이 청진항에 입항.

- 1960년

4월에 아사히· 마이니치·요미우리·산케이·교도 특파원이 각지에 쓴 기사가 ‘북조선의 기록· 방조 기자단의 보고(北朝鮮の記録・訪朝記者団の報告)’(신도쿠쇼샤(新読書社))로서 출판.

4월 16일, 북조선이 내각명령 제19호 ‘일본에서 귀국한 기술자 및 기업가의 사업 조건과 생활 활동을 적극 보장하는 것에 대해’를 결정.

4월 19일. 한국에서 4월 혁명. 이승만 대통령이 퇴진.

5월 12일, 북조선 귀국 방해 목적으로 밀입국한 한국 테러단 24명을 체포 (동일자 마이니치 신문). 게다가, 북조선 귀환을 저지하려고 테러 조직을 편성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8월, 북조선 개방 15주년을 경축하는 방조·일조협회(訪朝・日朝協会) 사절단이 북조선을 방문한다. 여기에 참여한 데라오 고로는 “귀국한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다”며 ‘조선 ・ 그 북과 남(朝鮮・その北と南)’(신니폿슈판샤(新日本出版社) 1961)에 저술했다. 동행한 세키 키세이(関貴星)는 “조국의 진실한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이(母と子)’ 8월호에 연재중인 ‘큐폴라가 있는 거리(キューポラのある街)’에서 북조선 귀환자를 가와구치(川口) 역에서 배웅하는 모습이 게재된다. 같은 해, 아동 극영화 ‘바다를 건너간 우정(海を渡る友情)’이 만들어진다. 

- 1962년

4월 8일, 일본 영화 ‘큐폴라가 있는 거리’가 개봉된다.

4월 10일, 세키 기세이가 ‘낙원의 꿈 깨져 - 북조선의 진상(楽園の夢破れて―北朝鮮の真相)’(젠보샤(全貌社))을 출판. 이듬해 63년에는 ‘갈라진 조국 - 속·낙원의 꿈 깨져(真っ二つの祖国―続・楽園の夢破れて )’(젠보샤(全貌社))를 출판.

10월 3일, 한센 씨 병 요양소를 퇴원한, 완치 증명이 나온 재일조선인에게, 본인의 ‘나(병) 기왕증(らい既往症)’을 이유로 북조선적십자 측이 귀환 선박 출항 당일에 승선을 거부했다(일본의 한센 씨 병 시설에 당시 750여 명의 조선인이 있었고, 그 중 150여 명이 귀환을 희망했지만, 북조선은 수용을 거부했다).

- 1965년

4월. 박경식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朝鮮人強制連行の記録)’(미라이샤(未來社))이 간행된다. 해방 직후의 조선인 귀국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무책임이라고 썼지만, 정작 1959년부터 시작된 귀환사업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책 끝의 ‘재일조선인에 관한 문헌 목록’에도 데라오 고로 · 세키 기세이와 같은 방북 기자단의 저작은 전혀 게재하지 않았다.

4월 29일, 영화 ‘미성년 ・ 속 큐폴라가 있는 거리(未成年・続キューポラのある街)’가 개봉된다. 원작에 없는, 일본인 처를 설득하고 귀환 시킨다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진다.

6월, 데라오 고로 ‘조선 문제 입문(朝鮮問題入門)’(신닛폰슈퍈샤(新日本出版社))이 출판된다. 북조선은 “8만 명의 재일조선인이 귀국하고, 더 할 나위 없는 국가의 극진한 보호 하에서, 전혀 불편함이 없는 생활에 들어갈 수 있는 사회”라고 기술.

6월 22일, 일본국과 대한민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일한기본조약)이 체결된다.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엄숙한 줄타기(厳粛な綱渡り)’(분게이슌주신샤)가 간행되었다. “북조선에 귀국한 청년이 김일성 수상과 악수하는 사진이 있었다. 우리는, 소위 공산권 청년 대책의 선전성(宣伝性) 문제에 대해 시누이와 같은 민감성을 가지곤 하지만, 그래도 그 사진은 감동적이며, 나는 거기에서 희망에 찬 자신과 자신의 민족의 미래에 관련한 삶을 시작하려 하고 있는 청년을 확실히 보았다. 반대로, 일본보다 철저하게 약한 조건에서 미군 주둔을 강요당하고 있는 남조선 청년들이 열정을 담아 이 북조선 송환 저지 시위를 하는 사진도 있었다. 나는 이 청년들의 내부에 품은 희망의 굴절, 그 축축함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은 감회를 느낄 수 밖에 없다. 북조선 청년의 미래와 순일(純一)한 희망을, 가장 의심하고, 가장 비웃는 자들이, 남조선의 희망에 찬 청년들이다, 라는 것은 나에게 고민의 맛을 맛보게 한다. 일본의 청년들에게 현실은, 남조선 청년의 그것과는 달리, 뒷 방향으로 닫혀 있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청년들에게 미래는, 북조선 청년의 그것처럼 똑바로 앞을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기술.

- 1966년

8월 23일, 일본정부가 캘커타 협정의 연장을 한번만 하고, 1년 후에 중단함을 각료회의에서 승인.

- 1967년

8월 12일, 일본 적십자사가 귀국 신청 접수를 마감한다.

8월 25일 - 9월 23일, 일조(日朝) 양국 적십자사에 의한 모스크바 회담. 결렬.

11월 27일 – 일조(日朝) 양 적십자사에 의한 콜롬보(コロンボ) 회담 시작.

12월 22일, 제155차 귀환선을 마지막으로 중단.

- 1968년

1월 24일, 콜롬보 회담이 결렬.

2월 29일, 일본 적십자사 니가타 센터가 폐지된다.

3월 31일, 국제 적십자 특별 대표단이 일본에서 철수.

- 1970년

12월 5일, 모스크바 회담에서, ‘귀환 미료자의 귀환에 관한 잠정 조치의 합의서(帰還未了者の帰還に関する暫定処置の合意書)’ ‘향후 새롭게 귀환을 희망하는 자의 귀환 방법에 관한 회담 요록(今後新たに帰還を希望する者の帰還方法に関する会談要録)’을 합의.

- 1971년

5월 14일, 귀환 사업이 재개.

- 1984년

귀환 사업 종료.


5 니가타 적십자 센터로 이동(新潟赤十字センターへ移動)

귀환자들은 일본 각지의 3,655개소에 설치된 일본 적십자사 창구(대부분은 지방 자치 단체가 창구가 되었다)에서 귀국 신청 절차를 밟은 후, 특별 열차를 타고 니가타에 설치된 적십자 센터로 향했다.

전 미군 캠프를 전용(転用)한 니가타 적십자 센터는, 넓이가 약 9.2헥타르이며, 숙소 및 사무동 외, 진료소·매점·은행 등이 준비되어, 귀환자들이 출국까지의 4일간을 보냈다. 귀환자들은 넓은 강당과 같은 숙소에서 원래 거주하고 있던 도도부현(都道府県, 일본의 광역 자치 단체인 도, 도, 부, 현을 묶어 이르는 말) 단위로 모였고, 재일조선인 요리사에 의해 조리된 조선식 요리가 제공되었다.

초대 센터장을 역임한 오자와 타쓰오(小沢辰男)는, 반대파의 방해 공작에 가장 신경을 썼다고 한다. 또, 적십자 센터에서는, 국제 적십자의 감독 하에, 귀국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면접이 진행되며, 그 후 출국 수속이 이루어졌다.




6 ‘지상낙원’과 귀국자의 그후(「地上の楽園」と帰国者のその後)

북조선은 매우 폐쇄적인 체제로,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하고, 영역 내에서 외국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허용하지 않는 데다가, 북조선의 문서 자료 입수가 어렵기 때문에, 귀환자들이 어떤 처우를 받았는지 탈북자 등의 증언을 통해서만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북조선의 신분제도인 출신성분에서 최하층으로 분류되며, ‘동요계층(動揺階層)’으로 차별받았다. 그러나, 일본공산당 당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핵심계층’이 된 사람도 적지만 존재한다.

초기 귀국선은, 소련 군함을 개조한 화객선 ‘쿠리리온(クリリオン)’, ‘토볼리스크(トボリスク)’가 사용되었다. 1960년에 제9차 귀국선으로 북조선에 건너가, 1963년에 정박 중인 일본선에 밀항해 일본으로 돌아온 김종국(金鍾国)은, 선내에서 하얀 밥을 원하는대로 계속 먹을 수 있었고, 고기·생선·야채가 듬뿍 사용된 식사가 제공되었으며, 과자나 담배는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고 수기에 쓰고 있다. 반면, 같은 시기에 귀국선을 타고, 1994년에 탈북해 한국에 망명한 정기해(鄭箕海)는, 귀국선 식사는, 나중에 생각하면 북조선에서는 그나마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밥도 고기도 곯은 냄새가 나서 먹기 힘들었다고 썼다.

귀환자는 청진에서 북조선에 상륙했고, 초대소라는 시설에 일시적으로 체류했다. 환영 행사 후 경력서 및 희망 배치를 북조선 당국에 제출하고, 사회 견학에 며칠을 충당한 후, 어디로 배치할지를 결정하는 면접을 받고, 각지에 흩어져 갔다. 귀국사업의 전성기에는 매주 1,000명 규모의 귀환자들이 북조선으로 귀환했던 것을 감안했을때, 사토 히사시(佐藤久)는 "(그런 큰 규모에서) 본인들이 납득할 만한 배치가 과연 얼마나 이루어졌을는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고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주택 사정도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북조선 당국은 홍보 잡지 등을 통해, 현대적인 주택이나 생활양식을 소개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선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택 사정은, 북조선에서는 한국전쟁의 정전(停戦)에서 귀환사업 시작까지 약 6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나, 일본에서도 1968년까지 총 주택수는 총 세대수를 밑돌았던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농촌으로 배치된 귀환자가, 그때 정해졌던 주거를 두고 “아첨으로라도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고 평가한 수기가 있다. 애초 주택의 부족 자체가, 당시 북조선 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과제였다. 또,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활 물자의 만성적인 (또는 결정적인) 품질과 수량의 부족도, 귀환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물자의 부족을 일본에 사는 친족을 통해 보완한 자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생존의 수단에 다름 아니었지만, 이국에서 심한 민족차별을 받고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었던 사람들이, 이런 수단으로 북조선에 없는 것을 얻은 것으로 인해 현지 주민들과 갈등의 골을 만든 것 같다. 귀환자들은 질투와 차별의 의미를 담아 ‘귀포’(귀국동포)라고 불리며, 잠재적인 반체제 분자 또는 스파이로 간주되어, 사회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사회주의 체제하의 북조선 사회에 있어서는, 귀환자들은 조선반도에 뿌리가 있으면서도, 미국식 자본주의의 생활을 피부로 알고서 거의 일본화된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체제에 대한 불만·비판과 관련해서는 엄격한 북조선에서는, 그런 행동은 호되게 다루어진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강제수용소에 보내진 귀환자도 많고, 소식·안부가 알 수 없게 된 사람도 적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빛나는 조국이라고 듣고, 아직 보지 못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가졌지만, 현실은 그것을 배신했다. 이윽고, 재일조선인 사이나 일본 국내에서도 점차 북조선의 실정이 밝혀지면서, 귀환자 수는 격감했다. 또, 일본의 경제 발전에 따라, 재일조선인이 생활고로 인해 북조선으로 건너가는 일도 없어졌다. 귀환자 중에서는 실제로 탈북해서 한국에서 일정 기간을 보낸 후, 한국 국적의 여권으로 일본에 다시 입국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1984년, 김원조(金元祚)는 ‘동토의 공화국(凍土の共和国)’을 출판하고, 조국 방문단에 참가한 일기라는 형식으로, 생활이 빈곤한 귀환자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 중에서, 생활 물자 마련  뿐만 아니라, 더 나은 배치나 거주지를 제공한다는 유혹에 의해, 귀환자들이 자신들이 속한 사업소에서 필요한 자재를 조국을 방문한 재일조선인에게 조르는 장면이 있다.

1997년, 북조선으로 건너간 일본인 배우자를 대상으로, 첫 일본으로의 귀향 사업이 진행 되었다. 2001년, 북조선 귀환 사업에서 조총련이 올바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국에 거주하는 남성이 조총련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도쿄 지방 재판소에 제기했다. 이 남성은, 1961년에 북조선에 건너갔지만, 현지 생활에 실망하고, 1년 반 후에 군사분계선을 넘어 한국으로 탈출했다. 재판은 1심과 2심에서도 민법상의 시효 도과가 성립하고 있다는 이유로 청구를 인정하지 않고, 2004년 9월 최고재판소도 상고를 기각하고 원고의 소송을 기각했다.

2007년 1월, 전월선(田月仙)은 ‘해협의 아리아(海峡のアリア)’를 출판했다. 저자의 생애전(半生伝と)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고, 북조선으로 건너간 이부형제(異父兄弟)의 그 후 인생을 썼다.

2008년 6월, 일본에 거주하는 탈북자 여성이 조총련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원고 여성에 따르면, ‘북조선은 지상낙원’ 등의 조총련의 허위 선전에 의해 북조선으로 귀환했지만, 실제로는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하고, 고문당하고, 차별받고, 죄수나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원고 여성은 “(조총련은) 사람들을 속이고, 조직적으로 납치했다. 인권과 자유를 무차별적으로 빼앗은 악마 같은 단체이다.” “나 혼자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수용소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 소송에 대해서도,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2009년 11월 30일에, 이미 귀환이 있은지 40년 이상 지나고, 손해배상청구권이 이미 소멸되었다고, 원고 여성의 청구를 기각했다.


7 영화 ‘동해의 노래’(映画『東海の歌』)

귀환 사업 50주년을 기념해서 북조선과 조총련이 공동으로 제작한 영화 ‘동해의 노래(東海の歌)’(2 부 구성)가 2009년 12월부터 북조선에서 개봉되었다.

영화는 재일조선인이 이국땅에서 ‘애국’을 가슴에 안고 인생을 걷는 계기가 된 김일성의 노선 전환 정책(1952년)과 조총련의 결성, 교육원 원조비와 장학금에 의한 민족교육의 발전과 귀국실현까지의 1940-50년대 재일조선인 운동의 주요 사건을 그렸다.

귀국선이 출항하는 클라이맥스는 나선(羅先) 부두에서 촬영되고, 2만 명의 엑스트라가 참가했다. 귀국한 북조선 공민들로부터 “당시 일본의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는 평가를 얻었다.


8 평가(評価)

냉전의 축도(冷戦の縮図)

재일조선인의 귀환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대이동, 즉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소련은 북조선 정부, 국제 여론에 제의하여 귀환 사업의 각 주변 문제를 해결해갔다. 또 일본에서도 좌파 세력이 대체로 협력적이었기 때문에, 사업의 진전을 뒷받침했다.

인질화(人質化)

귀국 운동을 전개한 조총련도 처음에는 북조선의 실정을 알 길이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사업이 시작된 초기에는 순수하게 인도적 문제로 귀국을 지지해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조총련이 언제 ‘지상 낙원’이 허위임을 알았는지, 어떤 경위로 귀국 운동을 대대적으로 계속하기로 했는지가 문제가 되고 있다.

귀국 운동은 조총련이 ‘귀국 실현은 김일성 주석의 혜택’이라고 선전하는 등, 북조선 체제와 정권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프로파간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혹시라도 북조선 귀국이 실패했다고 일본에 되돌아가는 자가 나타나면 곤란하기 때문에 “장남을 일본에 남기고 싶다면 동생을 북조선에 귀국 시켜라”라는 식으로 위협했고, 이에 조총련계 재일조선인은 형제, 부모와 자식이 생이별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일본에서는 “북조선 귀국자는 인질”이라고 표현되었다.


9 참고문헌(参考文献)

- 이노우에 마스터로(井上益太郎) ‘재일조선인 귀국문제의 진상(在日朝鮮人帰国問題の真相)’(일본 적십자사1956)

-김영달(金英達) · 다카야나기 도시오(高柳俊男) 편저(編著) ‘북조선귀국사업관계자료집(北朝鮮帰国事業関係資料集)’ 신칸샤(新幹社) 1995년, ISBN 978-4915924606

- 세키 기세이(関貴星) ‘낙원의 꿈 깨져(楽園の夢破れて)’ 아키쇼보(亜紀書房), 1997년, ISBN 978 – 4750597089. 1962년 젠보샤(全貌社)에서 출판된 ‘낙원의 꿈 깨져 - 북조선의 진상(楽園の夢破れて-北朝鮮の真相)’을 복각한 것. 북조선 귀국사업에 대한 비판서로서 초기의 것에 속한다. 귀환자들이 일본에 보냈다고 하는 편지를 일부 익명으로 게재하고 있다.

- 세키 기세이(関貴星) ‘북조선 1960-조총련 간부・첫 고발(北朝鮮1960―総連幹部・最初の告発)’ (미야자키 마나부(宮崎学) 감수, 2003 가와데쇼뵤신샤(河出書房新社) ISBN 4309242847 62년 간행 ‘낙원의 꿈 깨져(楽園の夢破れて)’와  63년 간행 ‘두 갈래의 조국(真っ二つの祖国)’을 재편집. 미야자키 마나부(宮崎学)와 양석일(梁石日)의 특별 대담도 수록

-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 박정진(朴正鎮) 편저(編著) ‘귀국운동이란 무엇이었는가(帰国運動とは何だったのか)’ 헤이본샤(平凡社), 2005년, ISBN 978-4582454321

- 정기해(鄭箕海) ‘귀국선 - 낙원의 꿈 깨진 34년(帰国船-楽園の夢破れて三十四年)’ 분게이슌주(文藝春秋) 1995년, ISBN 978-4163500102

- 나이토 요스케(内藤陽介) ‘북조선사전-우표로 해독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北朝鮮事典-切手で読み解く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 다케우치쇼텐신샤(竹内書店新社) 2001년, 43-45쪽, ISBN 978-4803503166

- 김찬정(金賛汀) ‘재일의용병, 귀환하지 않았다(在日義勇兵帰還せず)’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2007년 (민단에 의한 귀환 저지에 대해 상술(詳述)하고 있다)

-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검증 일조관계 60년사(日朝関係60年史)’ 아카시쇼텐(明石書店) 2005년 ISBN 978-4750322414


10 관련문헌(関連文献) 

- RP뉴스(RPニュース) ‘북선(호쿠센)이 일본 법률가 협회에 서한(北鮮が日本法律家協会へ書簡)’ 라디오 프레스(ラヂオプレス) (1958년 1월 22일) - 위키 소스(ウィキソース)

- 전월선(田月仙) ‘해협의 아리아(海峡のアリア)’ 쇼우갓칸(小学館) 2006년. ISBN 978-4093797450

- 김원조(金元祚) ‘동토의 공화국 신장판-북조선 환멸 기행(凍土の共和国 新装版 - 北朝鮮幻滅紀行)’ 아키쇼보(亜紀書房), 2008년. ISBN 978-4750508016

- 양동하(梁東河・)·나카다이라 신야(中平信也) ‘나는 이렇게 북조선에서 살아남았다! -‘탈북’한 전 재일조선인이 밝히는 ‘통제 경제’가 붕괴된 이후의 북조선의 서민 생활(わたしは、こうして北朝鮮で生き抜いた! - 「脱北」した元在日朝鮮人が明かす「統制経済」が崩壊した後の北朝鮮の庶民の生活)’ 슈에이샤(集英社), 2005년. ISBN 978-4087813241

- 기쿠치 요시아키(菊池嘉晃) ‘북조선귀국사업 - ‘장대한 납치’ 또는 ‘추방’인가(北朝鮮帰国事業 - 「壮大な拉致」か「追放」か)’ 주오고론신샤(中央公論新社) (2009/11) ISBN 978-4121020291

- 사카나카 히데노리, 기쿠치 요시아키, 한석규 ‘북조선귀국자문제의 역사와 과제' 신칸샤 (2009/12) ISBN 978-4884000882
坂中英徳, 菊池嘉晃, 韓錫圭 『北朝鮮帰国者問題の歴史と課題』 新幹社 (2009/12) ISBN 978-4884000882

- 장명수(張明秀) ‘모략・일본적십자 북조선 ‘귀국사업’의 진상(謀略・日本赤十字 北朝鮮「帰国事業」の真相)’ 고가츠쇼보(五月書房) (2003/4) ISBN 4772703896

- 효모토 다츠키치(兵本達吉) ‘일본공산당의 전후 비사(日本共産党の戦後秘史)’ 산케이신분샤(産経新聞社) (2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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