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칸하나다] 프로파간다 영화 ‘주전장(主戰場)’의 위선

편향된 반일좌익 관점 위안부 다큐 영화 ‘주전장(主戰場)’ ... “고난의 삶을 걸어온 여성에 대한 모독이며 위선의 극치”

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 2019.09.12 17:04:56



※ 본 칼럼은, 일본의 유력 시사잡지 ‘겟칸하나다(月刊Hanada)’의 인터넷판인 ‘하나다프러스(Hanadaプラス)’에 2019년 7월 3일자로 게재된 ‘프로파간다 영화 ‘주전장(主戰場)’의 위선(プロパガンダ映画『主戦場』の偽善)’을 ‘겟칸하나다’ 측의 허락을 얻어 완역게재한 것이다.  본 칼럼은 ‘겟칸하나다’ 2019년 7월호에도 게재됐으며 영문판 ‘Hypocrisy of the Propaganda Film: The Main Battleground of the Comfort Women Issue’도 별도로 발표됐다. (번역 : 황철수)




[필자소개] 이 글의 필자인 야마오카 데츠히데(山岡鉄秀)는 Australia-Japan Community Network(AJCN) Inc. 대표이며 공익 재단법인 모라로지(モラロジー) 연구소 연구원이다. 1965년 도쿄 출생. 일본 주오(中央) 대학교 졸업 후, 호주 시드니 대학 대학원, 뉴사우스웨일즈 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14년 호주 스트라스필드(ストラスフィールド, Strathfield) 시에서, 중국계와 한국계의 반일 단체가 추진하는 위안부 동상 설치 계획과 조우했었다. 이에 아이가 있는 어머니들과 함께 현지 일본계를 이끌고 AJCN를 결성했다. “지역 사회의 평화와 화합의 중요성”을 호소하고 비일본계 주민의 지지도 얻어, 압도적 열세를 만회했다. 결국 2015년 8월, 스트라스필드 시에서의 “위안부 동상 설치” 저지에 성공했다. 저서에 유엔의 사기와 아사히 신문 등 영어 선전전의 함정(陥穽)을 추궁한 ‘일본, 이제는 사과 하지마!(日本よ、もう謝るな!)’(아스카신샤(飛鳥新社))가 있다.   



조치(上智) 대학의 사상 환경(上智大学の思想環境)

흥미로운 보고가 있었다. 4월 상순, 홋카이도(北海道)의 작은 영화관을, 한 여성이 영화 선전을 위해서 방문했다. “도쿄에서 매우 화제를 모으고 있으니까, 여기(영화관)서도 상영을 부탁드리고 싶은데요?”라며 소개했던 영화가 바로 ‘주전장(主戰場)’이었다는 것이다.

그 여성의 이름은 석순희(石純姫). 도마코마이 코마자와(苫小牧駒澤) 대학 조교수였다. 석 씨는 2017년에 ‘조선인과 아이누 민족의 역사적 관계(朝鮮人とアイヌ民族の歴史的つながり)’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그녀는 “강제연행되어서 일본 국적이 없는 재일조선인에게 평등한 기회,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으며, 생존 위협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4월 13일에는 영화 '주전장'의 미키 데자키(ミキ・デザキ, Miki Dezaki) 감독의 긴 인터뷰가, ‘아사히 패밀리 디지털(朝日ファミリーデジタル)’에 게재되었다.

“나(미키 데자키)는 원래 유튜버로, ‘일본의 인종 차별’이라는 동영상을 내 채널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넷우익’이라는 사람들(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우익)이 그 영상을 찾아 보게 되어 저는 온라인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됐습니다. 그 후 전 아사히신문 기자인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씨가 위안부에 관해 쓴 기사로 인해 저처럼 비난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우에무라 씨와 나는, ‘누군가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가 방해를 받고 있다’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미국인으로서 나 자신은, 누군가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차단이 된다면 ‘그것은 안 돼!’라고 반응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고발이나 발언의 배경에는 고통받는 소수자, 당사자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는데, 고발까지 차단된다면 이중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인터뷰 영상이 촬영된 조치(上智) 대학에는 ‘주전장’의 포스터가 자랑스럽게 붙어있는 곳이 있었다. ‘조치 대학 글로벌 콘산 연구소(上智大学グローバル・コンサーン研究所)’다. 영화에 등장하는 나카노 코이치(中野晃一) 씨가 한때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도 소속되어있다.

이 연구소 홈페이지를 보면 사상적 경향이 명확하다. 예를 들어 잡지, 신문, 미디어 관계의 링크를 클릭하면, 각종 간행물의 링크가 나열되어있다. 이 링크에는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의 ‘세카이(世界)', 그리고 ‘슈칸긴요비(週刊金曜日)’, ‘인민신문(人民新聞)’(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매체다) 등등이 있다.

이렇게 데자키 씨가 어떤 사상 환경에 처해 있었는지, 어떤 사람들과 인연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주전장’이 그렇게 편향된 영화가 되어버린 것도 납득이 된다. 처음부터 그런 스탠스였던 것이다. 영화의 내레이션에서 데자키 씨는 말한다.

“놀랍게도, 나에게 붙은 반일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취재 요청을 받아 줬습니다”

 

‘아사히 패밀리 뉴스’의 인터뷰 기사 속에서 데자키 씨는 ‘나 자신이 일본계 미국인인 것이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라고 여겨지는 발언을 하고 있다.
 
또다시 완전한 착각이다. 이 문제는 그가 일본계 미국인인 것과는 100 % 무관하다. 인터뷰에 응한 보수 논객들은 모두 “위안부의 증언에서도 모순된 부분들이 있네요”라고 말하는 데자키 씨가 ‘위안부 성노예설에 의문을 품고서 공정하고 중립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자 하는 성실한 대학원생이리라 단순히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켄트 길버트(ケント・ギルバート, Kent Gilbert) 씨는 시사회에서 경악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사람들은 모두 양심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왜 데자키 씨를 믿었을까? 그것은 그의 국적 때문이 아니라, 그가 조치 대학의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학생이라면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도덕관에 따라 행동했다. 그 결과 호의가 이용당하고 말았다.

취재도 하지 않고 허위를 유포(取材せずに虚偽を流布)

특히 재난을 겪은 사람이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 씨다. 길버트 씨가 소개했기 때문에 무심코 취재 의뢰를 받았지만, 매우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

이 영화에 갑자기 등장하여 위안부 성노예 부정파에서 긍정파로 전향했다고 소개되는 케네디 히사에(ケネディ日砂恵, Kennedy Hisae) 씨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미국 언론인에게 6만 달러를 지불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실은 등장 횟수도 적은 사쿠라이 요시코 씨 인터뷰가 시작된다.

데자키 씨가 “당신도 그 기자와 관계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이라고 질문, 사쿠라이 씨는 표정을 흐리고 “그 건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복잡하기 때문에”라고 짧게 답한다.

데자키 씨는 이런 사쿠라이 씨의 반응을, 즉 마치 그 문제에 연루되어 입장이 난처해서 말을 할 수 없는 듯한 장면을 영화의 선전 버전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쿠라이 씨가 말끝을 흐렸던 것은, 정말로 그런 문제와 얽혀있어서가 아니라, 케네디 씨와의 개인적인 문제(인간관계 · 금전 관계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네디 씨가 여러 문제 끝에 사라진 것은 케네디 씨를 지원했던 사람들에게는 쓰라린 추억이다.

그리고 사쿠라이 씨야말로 케네디 씨와 상담을 해주고 지원을 하려고 했다. 코멘트를 피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쿠라이 씨 발언 분량은 적지만, 영화 후반에서는 “메이지 헌법 부활을 목표로 하는 일본회의(日本會議)라는 무서운 군국주의 집단”의 선전탑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린다.

일본회의는 이미 “이 영화는 사실무근의 망상”이라는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취재도 하지 않고 허위를 유포하는 것으로 ‘주전장’은 다큐멘터리가 아닌 프로파간다 영화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케네디 히사에 씨의 이름은 정작 영화 팜플렛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것이다. 출연자 목록에도 없다. 좌파로 전향한 케네디 씨야말로 데자키 씨의 최종 병기였던 것은 아닐까? 덧붙여서 정작 그녀가 접촉하고서 현금을 전달해줬다고 하는 미국 언론인은 “그녀에게 속았다”고 분노했다.

옴 진리교 문제 전문가로 유명한 기자인 에가와 쇼쿄(江川紹子) 씨는, ‘주전장’을 보고 다음과 같은 트윗을 남겼다.

“‘주전장’을 봤다.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이렇게 부정론을 꺼내는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보고 있었지만 너무 불공정한 제작법에 불편해졌다. 여러 사람들이 출연해 생각할 기회를 주는 작품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오히려 분열과 대립을 부추기는 작품이어서 매우 낙담했다”(6:20 - 2019년 5월 7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지식의 양이나 입장에 상관없이, 냉정한 사람이 객관적으로 보면 매우 불공정한 프로파간다 영화인 것이 분명하다.

위안부의 눈물을 정치에 이용(慰安婦の涙を政治利用)

‘주전장’ 후반은 황당무계했지만, 마지막에 데자키 씨가 등장시킨 것은 생전의 김학순 씨이다. 어린 시절, 맨처음에 손님을 대했을 때의 놀라움, 두려움, 그리고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는 김 씨의 모습을 보고 “일본인은 반성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수법은 고난의 삶을 걸어온 여성에 대한 모독이며 위선의 극치라고 생각한다.

김학순 씨는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숨기지 않고, 어릴 때 기생으로 팔렸던 사실, 기생업자 주인에 의해 중국으로 끌려갔던 사실도 솔직히 말했다. 오랫동안 일본에서는 빈곤으로 인해 딸을 유곽에 팔았던 비극이 있었고, 가난했던 조선반도에서는 더더욱 그랬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와 헤어진 소녀들은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또한, ‘연인(芸人)’으로 살아 갈 것이라고 배웠는데 매춘을 해야 했던 그녀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런 김학순 씨의 슬픔을 다른 사람이 짐작하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그녀의 눈물은 분명 진심의 외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용인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김 씨와 같은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아사히신문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김학순 씨에 대해 최초로 보도했지만, 그녀가 실은 부모에 의해 기생으로 팔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우에무라 씨의 한국인 장모(양순임 씨)가 회장이었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太平洋戦争犠牲者遺族会)’는 “일본 정부를 제소하면 배상금을 얻어낼 수 있다!”라고 외치며 후원금을 모으다가 우에무라 씨의 장모를 포함하여 사기죄로 재판까지 받았었다. 이중에는 체포자가 생기고 유죄 판결을 받았던 사람까지 있다.

당시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발전한 것은, 단순히 위안부가 존재했기 때문이 아니다. 일본군이 직접 조직적으로 인간사냥과 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끌어모아서 위안부로 만들었다든가, 또는 근로봉사 여자 정신대로 모집했는데 위안부로 만들었다든가, 하는 것과 같은 아사히신문이 유포한 허위보도를 일본 국민과 한국 국민이 믿고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씨는, 김학순 씨의 경우가 기생으로 팔린 여성으로서 군대에 의해 납치된 것이 아니라고 ‘분게이슌주(文藝春秋, 문예춘추)’를 통해 지적했다. 이에 따라, 요시다 세이지의 위안부 노예사냥 증언을 검증하기 위해 제주도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던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씨는 김학순 씨의 변호사인 다카기 겐이치(高木健一) 씨에게 전화를 걸어 “김 씨는 사실 부모가 기생으로 팔았던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다카기 변호사는 “그것(김학순 씨 경우)은 사례로서 나빴습니다”라며, “이제 더 좋은 것(다른 위안부 사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위안부는 오직 반일 활동과 돈벌이 도구인 것이다.

니시오카 씨는 서울에서 김학순 씨에게 만남을 청했지만 만나지 못했다. 대신에 일본어 통역을 맡았던 한국인 여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에 따르면, 그녀가 “할머니, 왜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고백하고) 나오시게 된거예요?”라고 물었더니, 김학순 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외로웠어. 친척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어. 그런데 식당에서 TV를 보고 있으니 징용된 사람들이 재판을 벌였다는 보도가 나온 것을 보니, 나도 포함된다고 생각한거야”


처절한 삶을 걸어온 여성(壮絶な人生を歩んだ女性)

일본인 중에서 최초로 위안부 피해자로 등장한 이는 시로타 스즈코(城田すず子, 가명) 씨다. 시로타 씨는 빵집을 운영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머니가 급사하고 급속히 가난해지면서, 가구라자카(神楽坂)의 게이샤(芸者) 가게에 팔리게 된다. 처음에는 잡일을 했지만, 이윽고 자시키(座敷, 기생)에 올라가게 된다.

그녀는 나중에야 아버지가 가게에 대해서 거액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근 학생과의 첫사랑 후, 난봉꾼에 팔리고 갑자기 임질(淋病)까지 걸리게 된다. 그 후 대만, 사이판, 트럭섬(トラック島, Truk Islands), 팔라우 등으로 이동하지만, 난양 군도에는 자신의 의사로 가게 됐고 일본 내지와는 달리 자유롭게 생활했다. 

미군의 공격이 닥쳐와서 일본 내지로 다시 돌아가게 됐지만, 애인을 만나고 싶어서 또 억지로 전장으로 되돌아갔다가 격렬한 공습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 군인과의 연애, 그리고 미국 병사와의 연애와 그의 임무 종료, 귀국에 따른 자살 미수, 학도동원(学徒動員)에서 귀국한 남성과 연애 도피, 유랑 끝의 동반자살. 자기만 살아난 후 알게 된 애인의 죽음.

도중에 몇 번이나 그녀를 구출하려고 하는 사람도 나타나지만,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고, 각성제, 도박, 담배, 음주에 빠져 회복할 수 없다. 마지막 순간에, 기적적으로 만난 사람의 도움으로 인해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는 지원 시설에 가고, 겨우 갱생하지만, 작업 중에 허리뼈가 부러지고 와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녀의 자서전 ‘마리아의 찬가(マリヤの讃歌)’(일본기독교단출판국(日本基督教団出版局), 1971 년 초판)를 읽고 몇 번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활발한 소녀는 어머니가 죽고 나서 얼마나 처절한 삶을 살았을까.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도 “빈곤이 나쁜 것”이라며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지는 않고, 고생하는 형제를 위해 항상 빚을 지며 고생했다.

그러나 그 한마디, “아버지는 정말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이었을까요”라고 본심을 말하는 장면은 정말 슬프다. 만약 그녀의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딸을 보호할 기개가 있었더라면 분명히 그녀는 이정도까지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문(碑文)에 허위 문장(碑文にある虚偽の一文)

하지만 그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명확해진 사실은, 그녀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매춘부로 살았지만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런 종군위안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군대에 강제연행된 것도 아니다. 일본군도, 미군도 상대했으며, 연애 관계에 빠지기도 했다.

빚을 갚고도 또 돈을 벌어도, 호의호식으로 낭비했다.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켜주는 부모나 친척이 없었기에 사회의 저변을 혼자 방황해야만 했다.

가난했던 일본이 대전을 거쳐 아예 잿더미로 돌아간 시절, 그녀처럼 인생을 걷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 적지 않았다.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한다.  

그녀의 사진이, 북미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동상이 세워진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 도서관에 게시되었다. 2013년, 한국인 반일 활동가들이 개최한 위안부 관련 패널 전시에서, 일본인 여성으로는 혼자 등장한 것이 시로타 씨였다. 

그녀의 사진 아래에는 “I was their slave(나는 그들의 노예였다)”라고 쓰여져 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영문 설명이 이어진다.

“1938년 시로타 스즈코 씨는 17살 때,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일본군에 팔렸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시로타 씨는 대만이나 사이판의 위안소에서 일했고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다”


완전한 허위다. 위안부 동상 옆에 박혀있는 비문(碑文)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 중국, 대만, 일본, 필리핀,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동티모르, 인도네시아 등, 일본제국군에 의해 집에서 끌려나가 성노예가 된 20만 명 이상의 아시아인과 네덜란드 여성에게 바친다”


이것 또한 거짓이다. 앞서 언급한 변호사도 한국인의 활동가도 여성의 인권을 말하면서 여성들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나는 진심으로 경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비문으로서 동상이 세워져, 고인의 경력이 허위로 이용되면, 당연히 지역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모욕당하거나 희롱당하는 일본계도 나온다. 일본의 브랜드력 저하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인의 반일 정신은 또한 중국 공산당의 ‘초한전(超限戦, 모든 수단에 의해서 제약없이 치루는 전쟁)’에 철저히 이용되고 있다. 호주 스트라스필드 시의 경우에도 갑자기 중국계, 화교를 중심으로 ‘일본의 전쟁 범죄를 규탄하는 회’가 결성되어 한인회에 위안부 동상 설치를 부추긴 것이다. 일본 정부가 사죄하고 보상하면 할수록 “약점”이 되어버리고 더 심하게 타격받게 되는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구도(問題が解決されない構図)

그런 사태가 되었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는 이제 학자가 아닌 사람까지 반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버린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주전장’에 등장한 그 보수파 사람들은 앞서 언급한 반일 단체의 프로파간다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주장한다.

사실 좌파라도 착실한 학자라면 반일 단체의 주장들이 학술적으로 허위가 많다는 것을 알 것이다. 데자키 씨도 어느 정도는 알 것이다. 그렇지만 “반일 단체의 주장은 학술적으로 정확하지 않고, 억지로 무관한 지역에다가 위안부 동상을 세우는 행위는 생산적이지 않기 때문에 종료해야 한다. 위안부 논란은 우리들 학자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좌파 학자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오히려 ‘성노예’나 ‘강제연행’의 개념정의를 확대하여서 반일 단체와 활동가를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위선적이고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할 뿐이다. 그래서는 언제까지나 논의가 평행선인 것이다.

‘주전장’에서 위안부 성노예파의 메인 스피커라고 할 수 있는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씨는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관헌에 의한 노예사냥과 같은 연행’은 조선·대만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여자정신근로령에 따른 위안부 동원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중략) 하지만 ’관헌에 의한 노예사냥과 같은 연행’이 점령지인 중국과 동남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종군 위안부’를 둘러싼 30가지 허위와 진실(「従軍慰安婦」をめぐる30のウソと真実)’(오오쓰키서점(大月書店))


즉, 법이 존재하고 통제되어있었던 조선반도와 대만에서는 권력에 의한 강제연행이 없었지만, 그 이외 전쟁터에서는 통제가 무너지고 범죄 행위도 있었으며 그것이 기록으로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비문을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으면 당연히 “무장한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일반 민가에 침입하여, 일반 여성을 납치하고, 성적 목적에서 노예처럼 혹사시켰다”고 이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요시미 씨 등의 학설과도 분명히 다르다. 명백한 허위이기 때문에 반론할 수밖에 없다. 

그러자 데자키 씨 같은 활동가가 나타나 이런 반론에 대해서 “역사수정주의자”, “부정론자”와 같은 모멸적인 표현으로 딱지를 붙이고 나선다. 이런 상황을 요시미 씨, 하야시 히로후미(林博史) 씨 등이 밀어주는 구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요시미 씨도 하야시 씨도, 위안부 제도는 일본군이 단독으로 만들어 냈던 것이 아니며, 여성의 인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조선반도의 유교적인 봉건제와 철저한 남존 여비 문화가 배경에 있었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현대의 가치관을 가져와 일본군과 일본 정부도 역시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어쨌건 딸을 팔았던 조선인의 부모가 있었고, 조선인의 뚜쟁이가 있었고, 손님으로서의 조선인도 있었다. 그것은 ‘당시 조선 사회 현실의 일부’(fact of life)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런 문제로 인해 단 한 건의 폭동도 발생하지 않았고, 일본군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인 병사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반일 이승만 정권조차 이 문제로 일본의 책임을 추궁하거나 배상을 요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도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제도는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였다고 강조하고,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서 분명히 사실과 다른 프로파간다를 전개하는 반일 단체를 용인하는 태도는 독선적인 일이며 ‘학자로서의 성실’(integrity)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요시미 씨와 하야시 씨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눈앞에 김 씨와 시로타 씨 같은 여성이 있었더라면 구할 수 있었던 것일까?

김 씨나 시로타 씨의 처지가 가슴이 아프다면, 혹은 곤궁한 위안부가 있다면 위로해주고, 정치 활동에 말려 들게 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당장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여성의 인권 침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한국에서 성매매가 불법으로 된 후, 많은 한국 여성이 세계에 진출해 매춘을 하고 있다. 악질적인 업자에 의해 구속 상태가 되는 여성도 많다. 

시드니 공항 세관 검사에서 걸린 젊은 한국인 여성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나는 한국에 있으면 미쳐버린다(Korea drives me crazy)”라고 울면서 호소했다. 북한에서 간신히 중국으로 탈출한 조선인 여성은, 말 그대로 성노예가 되었다고 보고되었다.  

당장의 문제는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고서, 위안부 동상을 건립한다거나 편향된 영화를 제작하여 마치 여성의 인권을 옹호하는 선인(善人)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매우 독선적이고 위선적이라고 봐야 한다.


이번에는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영화(今度は植村隆記者の映画)

놀라운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에 끝으로 보고한다. 전 ‘RKB 마이니치 방송(RKB毎日放送社)’ 직원으로 영화감독인 니시지마 신지(西嶋真司) 씨가 기안자가 되어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를 지원하는 영화 제작이 기획되고 있다는 것이다. 제목은 ‘표적(標的)’이다. 우에무라 씨가 부당한 언론 탄압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주장을 전개하는 영화라고 한다.  
 
조사를 해보면, A-Port 라는 아사히신문사의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기금을 모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일의 선봉장인 테사 모리스 스즈키(テッサ・モーリス=スズキ, Tessa Morris-Suzuki) (호주 국립대학교수)도 얽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금 달성률은 나머지 약 100일을 남겨두고 56% 라고 하지만, 이미 완성된 부분이 있고, 프로모션 동영상 시작 부분에 “일본의 정의가 추궁당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정말 염증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재판으로도 모자라, 정보전까지 하는 이런 집념은 본받아야 하는 것인가? 

가난한 시대의 부조리를 살아남은, 동정해야 할 여성들을 정치 도구로 이용하는 반일 세력의 공격은 그칠 줄을 모른다. 그들은 위안부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수법을 써서라도 일본을 세계 역사상 전례없는 범죄국가로 만들고, 영원히 일본인과 일본 정부를 규탄하려는 것이라고 간주되어도 어쩔 수 없다.

데자키 씨와 ‘주전장’이 그것을 다시 한번 가르쳐 주었다. 그들의 ‘표적’은 바로 일본의 명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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