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형 토오이츠닛포 주간, “일본을 있는 그대로 알고 차분하게 대하자”

“일본을 있는 그대로 알고 차분하게 대해야지 일본에 대해서 신화를 가지면 안 되고 불필요한 폐쇄적 민족주의로 일본을 무시하는 것도 안된다“

오문영 기자 ohyoung7777@naver.com 2018.08.02 22:40:36

주일공사 출신인 홍형(洪熒) 토오이츠닛포(統一日報, 통일일보) 논설주간이 “한국은 일본에 대해 신화적 이미지를 갖거나, 폐쇄적 민족주의로 무시해선 안된다”고 조언했다.

홍 주간은 지난해 6월 1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근대화의 국부 박정희를 다시본다’ 강연에서 “한국 사회는 일본을 우습게 보거나 경외심을 갖거나 둘 중 하나“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이날 강연에서 홍형 논설주간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비롯해 공산주의 세력이 양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왔는가에 대해 설명하며,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 이후의 대통령들을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일, 독도 영유권‧재일동포북송사업으로 대립

홍형 논설주간에 따르면 과거 이승만 전 대통령 재임시절 한‧일 양국은 독도 영유권 문제와 재일동포북송사업,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해 대립했다. 

한‧일의 독도 영유권 분쟁은 1952년경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51년, 일본은 연합국 48개국과 한반도 독립을 승인하는 내용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맺었다. 당시 일본은 이 조약에 독도가 대한민국 땅이라는 명문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독도를 자신들의 소유로 봤다.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2년경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하는 내용의 ‘평화선 선언’을 공표했고, 이후 어로저지선을 침범하는 일본의 어선을 나포하기도 했다. 이에 일본측과 대립하게 된 것.

이후 양국은 1959년 재일동포북송사업과 관련해서도 마찰을 빚는다. 재일동포북송사업이란 일본 정부와 북한이 일본에 거주하던 우리 동포들을 북한으로 송환했던 사업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 사업이 북한 공산주의의 공작이라는 것을 간파, 이를 극구 반대하면서 또다시 양국이 대립각을 세운다. (관련기사 : 홍형 토오이츠닛포 논설주간이 까밝힌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의 민낯)

특히 당시 일본은 대한민국보다 북한과 가까울 정도로 좌경화 풍토가 일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반공자유주의 세력의 편에 섰기 때문에 서로가 전략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정희, 일본 관계 정상화 위해 노력했다”

홍형 논설주간은 이러한 양국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며, 그가 냉전속에서 일본의 전략적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응했다고 평했다.  (관련기사 : 일본 시민단체가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회를 개최한 이유)

그는 박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반공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함께 공유하는 파트너로 인식하면서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양국 관계를 회복하고자 힘을 기울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등으로 인해 좌경화 일색이었던 것.

이후 일본은 80년대 후반부터 탈북자 등으로부터 북한의 실상을 알아가면서 우경화로 들어섰다. 반대로 반공을 유지하던 대한민국은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여론관리에만 치중한 나머지 ‘북방외교(공산권 외교정책)’ 등을 펼치면서 다시 일본과 대립 관계에 놓인다.

홍형 논설주간은 “박정희 대통령과 6공화국의 대통령들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라며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내면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반면 6공화국 대통령은 자기 인기 관리와 여론 관리에만 전념했으며 창조력도 아예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6공화국의 민주화 대통령들은 대한민국에서 냉전에 대응하는 국가 조직들을 철저하게 약화시켰다”며 “이분들은 국가 조직의 도움 없이도 혼자 싸워나갈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어야했는데,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조차 몰랐을 것”이라고 질타했다. 


“한국 사회, 일본을 우습게보거나 경외심 갖거나 둘 중 하나“

이어 홍형 논설주간은 그간 한국에게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할 많은 기회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1995년 김영삼 대통령 때 일본 고베 대지진으로 6천명이 사망했는데 대한민국 정부는 20만 달러, 북한은 7만 달러를 원조했다. 만약 내가 결정권자였다면 주저없이 몇 억 달러까지도 자원했을 것이다”라며 “이것으로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다시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고 짚었다. 

이어 “한국은 2011년 토호쿠 대지진 때도 일본에게 인도적으로 호의를 베풀 기회였지만 이를 놓쳤다. 일본이 돈이 없어서 한국에게 지원을 바라겠냐”며 “일본에 지진이 난 것은 일본에게는 불행이지만 우리에게는 한일관계를 회복시킬 절호의 기회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다 놓친 것”이라고 말했다. 
 
홍형 논설주간은 이제 한‧일 관계가 새롭게 시작돼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선 양국이 서로가 처해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지금) 한국 사회는 일본을 우습게 보거나 경외심을 갖거나 둘 중 하나“라며 “한국은 일본에 대해 신화적 이미지를 갖거나, 폐쇄적 민족주의로 무시해선 안된다”고 조언했다. 


          [ 홍형(洪熒) 토오이츠닛포(統一日報, 통일일보) 논설주간 강연 영상. 출처는 유튜브 '조갑제TV' ]



 [ 홍형 논설주간 박정희 시민강좌 강연 녹취 전문 ]


[홍형 토오이츠닛포(統一日報, 통일일보) 논설주간] 


현대사를 공부하는 학도로서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는 주로 조갑제 사장님이 쓰신 박정희 전기로 공부했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한국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라도 박정희 전기를 읽지 않았다면 전문가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조 사장님께서 쓰신 책의 일부는 저희가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통일일보는 교민들을 위한 신문이 아니라 일본 사회를 위한 신문입니다. 지금 여기 와 계시는 통일일보 사장님을 포함하여 저희가 통일일보에 애착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통일일보가 박정희 대통령의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조총련과 싸우기 위한 유산인 것이죠. 저는 그것을 당시 서울에 있었기에 몰랐지만 나중에 이것이 얼마나 한국에서 저희의 공산주의에 대적하는 빈약한 선전활동 속의 귀중한 자원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공무원은 전쟁 국가의 공무원이기에 다른 국가의 공무원과는 다릅니다. 모든 공무원은 전시상태기 때문에 생명을 바쳐서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긴장감은 박정희 대통령 사후 대한민국에서 없어졌습니다. 지금 저희는 열전보다 힘든 냉전을 치루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평화시처럼 살아가고 있기에 모든 위기가 초래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희가 일본을 얼마나 모르는가, 또는 일본이 한국을 얼마나 모르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한국 우파는 몇 퍼센트입니까? 이번 선거를 볼 때 저는 네 명 중에 한 명이 우파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어떨까요? 일본에서는 저희가 기대하는 우파는 백 명 중에 한 명도 없습니다. 저희가 일본에 대해 너무 모르는 채, 너무 쉽게 일본을 대합니다. 제가 보건대 한국 사회는 일본을 우습게 알던가 일본에 경외심을 가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일본을 있는 그대로 알고 차분하게 대해야지 일본에 대해서 신화를 가지면 안 되고 불필요한 폐쇄적 민족주의로 일본을 무시하는 것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6.25 전쟁이라는 열전을 마치고 냉전을 접했습니다. 냉전은 전 세계가 전쟁터 범위였고 아무도 냉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냉전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는 휴전이 되면 휴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일본에 있는 조총련과 같은 조선노동당 지부는 냉전이 되어야 전쟁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조총련이 한국을 요리했습니다. 일본의 언론은 패전 후 40년 동안 조총련이 지배했습니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서울 올림픽 기간에는 잠시 저희가 일본 언론을 지배했습니다. 그 다음에 동서 냉전이 끝나면서 한국은 좌경화되었고 일본은 철저히 우경화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양국은 전략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0년 제가 동경에 있을 때 일본인 친구들이 저에게 “냉전 후 양국의 진로를 위해 전략적 대화를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일본도 많은 고민을 한 것이죠. 일본이 미일동맹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정한 것이 1996년입니다. 6년 걸렸습니다. 미국과의 동맹 재정립에. 그런데 한국 측은 일본이 요구하는 접촉을 거부했습니다. 북방외교 하는 것에 바빠서 전통 동맹국과는 만나지 않은 겁니다. 그 기조가 지금까지 유지된 것입니다. 

서울 올림픽이 끝났을 때 일본 사람들은 처음으로 아시아에 일본만한 나라가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정말 옹호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울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5공 청문회가 열리면서 일본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사 이래 한국에 싹텄던 호의적인 감정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는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북방외교는 당초의 목적에서 벗어났습니다. 원래 목적은 평양 고립이 목표였지만 그 중간에 새로운 시장 개척, 즉 구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를 많이 함으로, 그걸 만족하는데 그쳤습니다. 

평양은 쓰러뜨릴 수 있었는데 살려주고 말았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말씀한 내용이 있습니다. 80년대 일본을 통해서 한국의 적화자금이 10년 동안 2조원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판검사의 3분의 1이 김일성 장학생이라는 비밀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박정희 대통령하고 6공화국의 대통령들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상황 타개를 하기 위하여 머리를 쥐어짜 내고 상상력을 만들어내고 이끌어갑니다. 

6공화국 대통령의 스타일은 자기 인기 관리와 여론 관리에 전념합니다. 창조력이 아예 없습니다. 예외적으로 창조력이 있을 때는 반헌법적인 선언을 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달려갔을 땝니다. 아주 나쁜 창조력을 발휘한 경우입니다. 동서냉전기에 조총련과 북한이라고 하면 저희에게는 블랙박스였습니다. 평양의 DNA를 몰랐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부터 탈북자가 옵니다. 예를 들면 김현희 같은 사람들. 그들을 통하여 북한을 엿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저희가 아무것도 모르고 싸워 온 겁니다. 

그런데 정보가 들어오자 저희가 비로소 일본에서 조총련을 압도할 계기를 잡은 겁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월간조선과 조갑제 사장님께서도 많은 공헌을 하셨습니다. '냉전은 군사력으로 싸우는게 아니라 지혜와 과학으로 싸우는 것이다.' 문제는 6공화국의 민주화 대통령들이 대한민국에서 냉전에 대응하는 조직들을 철저하게 약화시켰습니다. 이분들은 국가 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자기가 싸워나갈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어야했는데 이 분들은 자기가 하는 짓이 뭘 의미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노태우 대통령이 2조원을 말씀하셨다고 말했는데 노태우 대통령 때는 김일성 정권의 가장 취약점이 무엇인지 이미 보고됐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평양을 공략하는데 군사력을 쓰지 않고도 저놈들을 극복할 수 있는지가 보고됐습니다. 그런데 대통령들은 정보 보고만 받고 끝입니다. 그 최고의 고급 정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대통령은 전략적으로 큰 국면에 착안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무원들이 세부적이고 실효적으로 착수를 하게 됩니다. 제 기억에 6공화국에서 그러한 차원의 국가 지도가 있었던 기억은 없습니다. 동서냉전이 끝나고 세계의 지도의 색깔이 바뀔 때 대한민국 청와대는 일선에 아무런 훈령이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6공화국 대통령들은 학생들이 수학여행 가듯이 매년 정해진 코스대로 외유를 즐겼습니다. 대통령이 뭘 하는 건지도 모르는 분들이 그저 5년을 무난히 넘기려고 했습니다. 지금에서야 탈북자, 북한인권문제 핵미사일 도전, 중국의 한반도 도발 등 여러 문제에 대해서 이분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상상합니다. 

지금 한일 관계는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이 주권을 회복했을 때 일본 외무성은 과연 한국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연구가 제가 알기로 없는 걸로 압니다. 어느 분이 이걸 연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자료를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언입니다. 한일 양국이 식민지를 벗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대립이 이겁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집어넣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독도를 한국의 영향에 넣었어요. 그리고 일본 어선을 나포합니다. 일본 국민들이 그래서 이승만은 미워하죠. 

그래서 한일 양국이 근본적으로 넘어야 할 장벽이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입니다. 두 번째 갈등이 국교 정상화 이전 재일교포 문제입니다.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인 재일교포들을 10만여 명이 일본이 북으로 보냈습니다. 이거 당시에 초등학교에서, 관제 데모도 아니고 진심으로 분노를 담아 데모했습니다. 6.25 휴전된 지 6년 이후의 일입니다. 이렇게 북송을 시작한 지 6년 뒤에 한일 국교 정상화 되는데 그 이후에도 일본은 북송을 계속합니다. 1984년까지요. 제가 조총련이 일본에서 헤게모니를 잃었다고 말한 시기와 일치합니다.

작년 3월 일본 정부가 48년 만에 일본에 사는 재일 한국인들의 국적을 대한민국과 조선으로 구분하여 발표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1968년 일본 법무성 출입국관리백서에서 일본에 사는 재일 한국인들의 한국 국적과 북한 국적을 나누어 발표한 이후에 일본이 그것을 감추었다가 작년에 발표하였고 현재 조선적을 유지하는 사람은 3만 명이 안 될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에 재일 동포 사회가 당시 합법적 체류자는 60만 명 선이었습니다. 불법적 체류자까지 더하면 더 많겠죠. 그런데 그 60만 명 중에 1970년 이전까지는 북한 국적이 많았다고 추정합니다. 그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노력에 의하여 역전된 것이죠.

그런데 말이죠. 이 백서는 5년에 한번 씩 나옵니다. 68년에 나오고, 72~3년쯤에 나오는 백서의 숫자에 저희는 기대를 하였습니다만 그 때의 백서는 재일 한국 조선인이 합해져서 나옵니다. 한국과 북한을 구분하지 않고요. 북한이 패배했다는 것을 일본 정부에서 숨겨 준 겁니다. 근거 없는 낭설로는 일본 수상 경험자한테는 억 단위의 정치자금을 매년 바쳤다고 합니다. 물론 엔화로요. 그 정도 공작을 했기 때문에 저희가 일방적으로 일본에서 당했습니다. 이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당시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간신히 만회한 순간 대한민국 자체가 좌경화 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양국은 충돌 국면으로 갑니다. 

저는 지금도 정말 분하게 생각하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김영삼 대통령 때 1995년 1월에 고베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당시 자민당과 사회당 연립정권은 굉장히 무능했습니다. 6천 명이 불타 죽습니다. 그 때 대한민국 정부가 20만 달러를 원조했습니다. 북한은 7만 달러를 원조했습니다. 그 때 만약 제가 결정권이 있었다면 주저 없이 몇 억 달러까지도 지원했을 겁니다. 그럼으로써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대한 감정이 사라지고 한국이 대화를 요구하면 흔쾌히 나와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공화국을 돌아보면 수 많은 기회가 오는데 다 놓칩니다. 

일본에 지진이 난 것은 일본에게는 불행이지만 우리에게는 한일관계를 회복시킬 절호의 기회인데도 불구하고 다 놓칩니다. 일본이 돈이 없어서 한국에게 지원을 바라겠습니까? 2011년 토호쿠 대지진 때도 일본에게 인도적으로 호의를 베풀 기회였지만 놓쳤습니다. 월간조선에도 실린 것이지만 ‘나라는 만들었지만 국민을 만들지 못했다’는 말대로, 말도 안되는 지금의 주사파 탈레반 정권이 생긴 것도 국민을 만들지 못해서입니다. 

시간을 너무 많이 써서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하건대 이제 다시 원점에 섰습니다. 일본과 한국이 다시 주권 국가로 만났던 1952년처럼 말이죠. 일본은 헌법 개정이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전쟁에 져서 개헌한 것 빼고는 한 번도 스스로 개헌한 적이 없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GHQ에 의한 헌법 개정 말고는 한 번도 없는 것이죠.

지금 헌법 개정한다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대놓고 찬성이니 반대니 하기 전에 일본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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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영 기자 ohyoung7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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